자괴감에 휩싸여

피에로 질-장 앙투안 와토, 18세기경

by 루시

어제는 기분이 바닥을 깔았다.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자괴감.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하는 것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을 하는 것은, 몇 배나 더 나를 힘들게 한다.

어떤 대단한 일을 하다가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업무의 기본, 정말 기본적인 사항이었는데 그것조차 나는 알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나라는 사람이 기본도 하고 있지 못했구나…… 이런 생각에 오후 내내 회사에 있기도 힘들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실망감도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한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저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속은 편하다. 귀책사유는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 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괴감에 빠지면, 이건 헤어날 길이 없다. 철저하게 나 자신에게 모든 귀인이 떨어지니 숨을 구석도, 변명의 여지도 없다. 정말 어제는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살면서 이런 자괴감을 얼마나 더 맛봐야 할까? 만약 내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직장 생활이라면 솔찬히 해온 것 같은데 기본적인 준비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루가 지났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부끄러움을 넘어 슬프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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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에로는 원래 공연에서 남들을 웃기고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익살스럽게 분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장 앙투안 와토가 그린 피에로 질은 다르다.

그의 옷은 눈처럼 하얀색이다.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알록달록 화려한 색감의 피에로 옷이 아니다. 이 하얀 옷이 비현실적으로 과장되게 부풀어 오르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그가 피에로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는 슬퍼 보인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자괴감을 느낀다. 피에로라는 일이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극단의 막내로 들어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도시로 올라와 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은 법. 애송이를 바로 주연으로 써줄 극단은 없다. 이미 ‘드르르’한 선배들이 많다. 연기력도 그렇고 경력도 그렇고.

“일단 피에로로 일을 시작해 보게.”

극단 감독은 질의 훤칠한 얼굴을 힐끔 보고 나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릿광대 일을 시키다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배우로 데뷔를 시켜보리라 생각하면서.

질 역시 첫 술에 배부르랴는 생각으로 감독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수도, 이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설렜을 수도 있다.

극단의 막내란 아마도 만능 일꾼이라는 역할도 해야 했을 것이다. 청소며 갖은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면 분위기를 후끈 달구기 위해서 오프닝을 맡는다.

처음에는 피에로 질도 아주 의욕적이었을 것이다. 힘차게 계단을 올라가 무대로 나아갔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을 향해서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의 되지도 않는 말에 관객들이 박장대소하는 것을 보면 어디선가 힘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질에게는 꿈이 있다. 피에로가 아닌 배우로서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가 도시로, 극단으로 들어온 이유이자 살아가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배우로의 전직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극단 배우 중의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지 않는 이상 질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의 얼굴은 한없이 슬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이런 ‘웃기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가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리며 전율하게 만드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내 꼴은 뭘까.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자괴감이 순식간에 질을 덮친다. 그는 지금 어릿광대 노릇을 할 마음이 없다. 그저 멍하게 앞을 응시할 따름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불현듯 자괴감을 느끼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관객석에서 고향 친구들의 얼굴을 봤을 수도, 더 심하게는 부모님의 얼굴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동안의 노력이나 열정을 고향 사람들이 알 수는 없다. 그들에게 질은 그저 ‘피에로’ 일뿐이다.


이 그림은 184 x 149 cm의 크기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본다면 상당한 중압감으로 다가올 것 같다. 화폭을 가득 채운 질의 모습에, 질의 슬픈 얼굴에. 그의 광대 같지 않은 하얀 옷은 일부러 부풀려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유도하는 듯하다. 그가 신은 구두는 21세기를 사는 내가 신고 싶을 만큼 곱기도 하다. 하얀 가죽과 핑크빛 끈의 조화라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어릿광대 공연에 어울리지 않게 슬픈 얼굴을 한 피에로 질의 뒤로는 동료 배우들의 모습이 보인다. 연배 지긋한 중년들로 연기 고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오, 그 당나귀까지 오늘 무대에 등장한다고요?”

동료들의 시선은 소품으로 등장할 당나귀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 무대에 오를 피에로 질의 컨디션에는 모두 관심이 없다. 그는 당나귀만큼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타인의 이런 푸대접 역시 그를 한없이 슬프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화폭의 분위기는 낭만, 그 자체이다.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도 로코코풍으로 우아하다. 섬세하게 인물들의 분위기를 잘 포착하고 있다. 화가인 장 앙투안 와토는 살아생전 많이 아팠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덧없음’을 표현한 우울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와토의 초상화를 보니 핏기 하나 없는 얼굴색이, 과연 이라고 해야 할까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햇빛을 받은 건강함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결핵으로 고통받았고, 그 때문에 참을성도 없어지고 성격도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건강은 18세기나 21세기나 여전히 중요하군요.) 그는 때로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리기도 했다고 하니(내 몸 귀찮은데 이게 무슨 소용이야? 에잇! 아마도 이런 심정이었겠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은 동정심이 인다. 1719년에 그는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떠났는데, 추운 날씨에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영국이 의술은 발달했을지 모르지만 기후는 우울 그 자체잖아요.), 37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만약 오래 살았더라면 이런 멜랑꼴리 한 분위기, 우아한 화풍의 그림을 더 많이 볼 수 있었겠지만 그건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 입장이고, 병으로 고통받는 그에게는 고통 없는 피안의 삶이 더 편안한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피에로 질의 얼굴을 바라본다. 오늘은 나도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무리다. 적어도 며칠은 더 자괴감에 휩싸여 피에로 질의 얼굴을 하고 다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