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질러!속이후련해질 때까지

절규-에드바르트 뭉크, 1893년

by 루시

그는 항상 걱정과 근심을 달고 산다.

어떻게 하니.

큰일이다.

걱정이다.

이 3종 세트가 그의 입에서는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조직장으로 있으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왜냐, 그가 항상 ‘전전긍긍’ 하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계속 전전긍긍하다가는 그야말로 온 신경이 너덜너덜, 남아날 수가 없다.

한 가지 사안이 발생하면 그는 너무 많은 옵션을 준비한다.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 본인이 불안하기에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플랜 B에 C는 물론이고 Z까지 준비하지 않으면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물론 이런 사람의 장점도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업무를 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은 대체로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조직원은 피곤하다. 보고를 하고 나도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옵션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뭐랄까, 시시포스처럼 무거운 돌을 힘들게 정상으로 날랐다가 다시 내려와 그 무거운 돌을 또 짊어지는 심정이다.

걱정과 근심이 많다 보니 결단은 쉬이 내려지지 않는다.

그는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지 않는 사람이다. 좋게 신중하다고 표현해보자. 하지만 옆에서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보통 의사결정권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의사결정’이다. 걱정과 근심과 다양한 가능성은 검토 단계에서 빛을 발한다. 의사결정 단계에서는 과단성도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 과단성은 히말라야 정상의 공기만큼이나 희박하다. 그래서 조직원은 거듭되는 버전의 보고서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조직장의 걱정과 근심, 두려움은 조직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그다지 긍정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방향으로.


두려움.

인간인 이상 두려운 마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는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이 비교적 적을 것이고 걱정과 근심을 달고 사는 사람은 두려움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살아간다. 두려움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일 수도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기에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줄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부단한 노력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자꾸만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움에 휩싸이는 마음을 관찰하며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자문해간다면 극복 못 할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은 전염이 쉽게 되는 것 같다. 집단적 공포로 떨게 되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패닉에 조직이 빠지는 경우도 종종 목격한다.

굳이 저렇게 까지?

이런 생각이 드는 지경에 이르면 나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리고 이 그림도 떠오른다.

절규-천재학습백과 초등 명화미술관.jpg [from : 천재학습백과 초등 명화미술관]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의 충격은 강렬했다. 우리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현상을 붓으로 표현한 것만 같은 그림.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는 ‘절규’에만 집중한 한 사람. 그의 벌린 입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흡입력을 이 그림은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나 조차도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만 같은 ‘미칠 것 같은’ 강렬한 느낌.

뭐 이런 그림이 다 있지?

싶으면서도 눈길을 떼지 못하고 머릿속에 달라붙어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 그림이다.

남자는 다리를 건너는 도중이다. 뒤로는 핏빛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다. 범상치 않은 하늘의 붉은 기운과 소용돌이치는 물길을 보고 있노라면 소리치는 남자만큼이나 자연 역시 뭔가를 절규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남자의 수런스러운 마음만큼이나 자연도 심란해하고 있다고. 결코 편안하고 고요해질 수 없다고, 우리도 너만큼이나 아우성을 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해 질 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어요.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그 자리에 멈춰 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어요.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에 걸린 칼을 보았어요.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어요.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어요.”

뭉크가 이 그림에 대해서 남긴 글은 유명하다. 뭉크는 노르웨이 작가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무대인 오슬로에 출생 이듬해에 이주했다고 한다. 가족 전체가 병약했던 것 같다. 폐결핵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어린 나이에 잃었고 여동생은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 역시 병약했다고 하니 심각한 허탈감과 무력감에 젖어들지 않았을까.

인생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나는 또 왜?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들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죽음, 절망과 같은 무게감 있는 모티프가 연속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대각선으로 잘린 화면의 하단에 위치한 해골 같은 남자의 절규. 절망의 끝에서 그야말로 살아보겠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나도 회사의 그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잠깐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뭉크의 절규처럼 소리를 후련하게 내지르고 두려운 마음을 좀 떨쳐보라고, 불식시켜 보라고 절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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