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조르주 드 라 투르, 16세기경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이런 사람, 저럼 사람, 그런 사람이 섞여 있는 까닭이다. 이제 회사 생활을 오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인데 태연하게 그 일을 하지 않거나 남에게 미루거나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황당함이다.
특히 상사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좌절을 느끼게 한다. 어제가 그랬다. 그래도 평소에 (그래도) 좋아하던 상사였는데 말이다.
TFT의 멤버가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퇴직하는 멤버가 있는 팀의 조직장은 후임을 배정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욕 나오는 상황이죠? 이게 1차 문제이기도 하고.) 하지만 일은 해야겠기에 TFT장이자 나의 직속 상사이기도 한 선배를 찾아갔다. 물론 이전에도 얘기는 해둔 상황이었다. 그때는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나는 당연히 그가 해당 팀의 욕 나오는 조직장을 윽박지르던 구슬리던 후임을 지정하는데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니?”
입틀막!
순간 숨도 잘 삼켜지지 않았다.
네 뭐라고요?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럼 그걸 니가 안 하면 누가 하니?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목 뒤편으로 넘겼다.
그가 이렇게 행동을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 그와 해당 조직장(음, 빙그레 **이니 빙그레로 해두자), 즉 빙그레는 사이가 좋았다. 아마 회사 내에서 윗 공기를 맡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친할 것이다. 그러니 껄끄러운 거다. 빙그레가 뒤끝 끝판왕이라는 사실도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흥!
야, 이 업무 해야 하는데 후임이 누구야? assign 해야 일을 할거 아니야.
이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또 사사로운 사이를 가를까 봐 두려운 거다. 그런 저간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나는 업무 연관성이 높은 다른 팀의 다른 조직원을 말해 놓은 상황이었다. 빙그레와의 사이가 그렇게 중요하면 다른 조직원을 구해오거나 하면 될 일이다. 그도 엄연히 그 프로젝트, TFT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니?”
라니,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너무 많았다. 니가 프로젝트 리더잖아. 그러니 이런 일은 니가 나서서 해야지 그럼 누가 하니? 지금 장난하냐!!!!!!!!!!!!!!!!!!!!!
그래서 어젯밤은 잠을 못 잤다-고 하고 싶지만 오후에 커피를 마신 것 때문에 잠을 못 자면서 누워서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왜 조직에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역할을 하지 않는지 화가 나서 잠은 저 멀리로 달아나버렸다.
윗사람이란 이런 조직 간의 문제, 밑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리얼 월드에서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게 된다. 그냥 그런 생각은 나의 신념에 지나지 않나 보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지만 이제 이 프로젝트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나도 한번 가만히 있어볼까 봐.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해? 나는 분명히 누군가는 assign 돼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또 월요일이 되면 이 문제의 ‘슬기로운’ 해결을 위해서 머리를 짜낼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에 마음은 가을장마의 어두침침한 하늘처럼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진짜 속내를 감추고 일은 요령껏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는 프로들의 세계, 이게 혹시 임원들의 리그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속임수. (물론 내가 도박을 좋아하는 속내도 작용하겠지? 어딘가로 날아가서 그냥 한판, 확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 화면 정중앙의 얼굴이 긴 귀부인의 눈을 보라. 저러다가 그냥 '돌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시녀에게 곁눈질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저기, 너무 티 나는 거 아니니?)
저 자식 패 봤어? 뭐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거야? 이길 수 있는 패라면 사전에 약속한 대로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치떠!
이런 말을 속으로 뇌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와인병을 들고 루비빛 와인을 유리잔에 따른 시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잔을 귀부인 앞에 내려놓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귀부인만큼이나 눈동자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놓은 그녀에게 그것은 모종의 신호를 귀부인에게 보내는 것이겠지?
네 마님, 맞아요. 제 눈동자 신호, 잘 보이시죠?
하지만 이 도박판을 둘러싸고 눈동자를 ‘표 나게’ 오른쪽으로 올리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화면 왼쪽에 앉은 남자다. 그가 가진 패는 다행히 우리에게 보인다. 어라? 에이스잖아? 다이슨 에어롤로 옆머리를 한껏 치장한 것 같은 멋쟁이 남자는 얼굴도 곱상하니 생겼다. 영민해 보이는 얼굴이다. 좋게 표현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 등 잘 처먹게’ 생겼다.
반면 화면 오른쪽에 화려한 옷을 입은 하얀 얼굴의 남자는 살이 포동 하게 오른 게 그 앞에 있는 금화로 보아 부잣집 도련님 같다. 남의 등을 칠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의 도련님이다. 그 앞의 금화를 다 날려버린다 한들, 집의 재산에는 표도 안 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느긋해 보이며 그림에서 유일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지 않는, 단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하지만 매력은 역시 사기꾼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사기꾼'이라는 주제는 카라바조가 1594년 경에 로마에서 그린 세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인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후 많은 화가들이 이를 모방했다고 한다. 역시 카라바조는 천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무언가의 ‘시초’가 되는 사람. 이 그림을 봤을 때 그가 떠오른 것도 우연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른쪽 사람이 ‘여자’라는 것이다. 엥? 여자였나요? 옷이 하도 화려하기에 설마,,,,,, 했었는데 여자라고 하네요. 수더분하게 생겼군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생김을 가진 사람이다.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남자였는데 의상을 보니 여자 의상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호옥시 여장 남자는 아닐까?) 그리고 화면 중앙의 귀부인과 시녀는 왼쪽 사기꾼의 수법을 눈치챈 것으로 해설하고 있었다. 흠. 그렇게도 보이는군요. 이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다. 루브르에……
회사의 수많은 눈치작전과 교묘한 속임수와 술수 등을 이렇게 희화화해서 생각하지 않고는 정 떨어져서 더 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다. 회사는 거대한 도박판이다. 내 패를 보여주지 않고 남의 패를 파악해가는, 날고 기는 사기꾼들이 가득한 곳이다. 포커페이스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나 같은 초짜는 어쩌면 낄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흘러내리는 나의 멘탈을 부여잡으며 루브르에 갈 돈을 벌기 위해서 월요일에도 꾸역꾸역 출근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