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럭으로도 혼을 낼 것 같은 무서움

자화상-윤두서, 1668년

by 루시

거울을 보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를 아쉬워하지 않을까?

‘눈이 좀만 더 컸더라면 좋았을 것을.’

‘코 모양이 조금만 더 날렵했더라면.’

‘입술 끝이 아주, 아주 살짝만 위로 올라갔으면.’

따지고 보면 수 십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항상 자위하지만(웃어 보자, 기분을 내보자, 이 정도면 괜찮은 거다!) 그래도 진실을 숨길 수는 없다.

눈은 홑꺼풀이었으면 어땠을까가 항상 궁금하고 코의 위치도 좀 마음에 안 든다. 입술은 좀 더 길게 길이가 늘어났으면 좋겠고…… 그래도 항상 거울을 보며 그런 생각을 애써 억누르며 괜찮다는 자기 주문을 걸고 있으니 스스로도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술 작품 중에서 자화상을 볼 때마다 나는 화가들의 기개랄까, 솔직함이랄까 이런 것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용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자신 스스로 싫어하는 단점까지도 정직하게 화폭에 담아내는 강심장이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화가들이 모두 선남선녀는 아니다. 개중에는 당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외모를 가졌던 화가도 있지만 지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자화상은 하나같이 그들이 가진 개성을 강렬하게 담고 있다. 작가로서의 성격,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고집스러움, 이런 것들이 농밀하게 묻어난다. 어쩌면 자화상이기에 그런 작가의 개성이 더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화상-윤두서.jpg 진짜 강렬하죠? [From naver]

하지만 윤두서의 자화상은 나에게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무서웠다.'

여태까지 화가의 자화상을 보면서 무섭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 받을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야말로 턱수염으로 나를 후려칠 것만 같은, 그런 무서움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얼굴과 수염으로만 오롯이 표현된 것이 마치 유령이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이 더해지면서 더 증폭된 과도한 공포감일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 윤두서는 마치 추상과 같은 호령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입 벙긋하지 않은 채로.

무서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자화상을? 윤두서?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헤헤, 이 분도 전 잘 몰라요)과 함께 조선의 3재로 불리던 선비화가라네요. 윤두서의 호가 ‘공재’라는 것도 이번에 두산백과사전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또한 원래는 선명한 옷 주름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사라진 것이라고 하니 그것 역시 이 자화상의 운명인 듯싶다. 옷 표현이 없었기에 자화상의 신비한 매력은 더 배가된 것이 아닌가.

윤두서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인상을 준다. 눈썹도 뒤로 갈수록 위로 올라가는 형이고 그의 얼굴 옆의 수염도 위로 향하고 있다.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 터럭으로도 혼을 낼 것 같은 인상이다. 작은 거 하나도 안 넘어갈 것 같다.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시선은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을 것 같다. 상대의 영혼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움. 그래서 나는 그의 자화상 앞에서 얼음처럼 얼어붙고 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20150923_101701.jpg 헤라클레스도 한 '성깔' 했을 것 같죠?

이런 사람이 상사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그런데 다들 이런 상사 한 명쯤은 있지 않나요? 괜히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심장은 두근반 세근반, 진정이 되지 않고. 똑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것도 그 사람이 물으면 횡설수설하고.

왜 그럴까. 무서움, 두려움, 이런 것들이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그저 직장일 뿐인데.’

‘고작 직장일 뿐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배포가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요즘이랍니다. 상대는 궁금해하는 것을 물을 뿐이고 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왜곡 없이 대답할 뿐이다. 우리는 일대일, 평등한 인간이니까.


다시 자화상으로 돌아가 보자. 윤두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는 강직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누구에게든 가차 없는 원리원칙주의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저렇게 수염 한 올 한 올을 다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특히 본인의 자화상에 저 정도의 공력을 들일 정도라면 타인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상당히 엄격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넘겨짚어 본다.

“먹을 안 갈아 놓은 것은 갑자기 마님이 부르는 바람에.”

이런 변명을 해도 그는 자화상에서처럼 지그시 하인을 응시하지 않았을까. 그럼 무안해진 하인은 스스로 ‘쇤네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가운데 부지런히 먹을 갈지 않았을까. 물론 화가 났을 수도, 억울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마음을 먹을 쥔 손에 가득 담아서 쓱쓱쓱 갈아댔을 것이다.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윤두서가 진짜 화가 났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도 생각해본다. 연륜도 있겠다 꿀릴 것 없겠다 그러면 노발대발의 정도도 호랑이가 포효하는 정도는 우습지 않았을까.


세상은 코로나로 호황을 맞이하는 업종보다 불황을 맞이하는 업종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더 자주 상사에게 불려 가고 더 자주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다. 나의 상사 역시 윤두서처럼 연륜이 있다. 팔자 주름을 깊게 파고 있다. 턱수염을 기르고 있진 않지만 호랑이와 같은 포효할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무서운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

그래도 우리 상사가, 이 정도로 무서운 인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용기를 내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