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통하는상대라고요?

동자견려도-김시, 16세기 후반경

by 루시

어느 조직이든 사람이 일정 수 이상 모이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 사람은 꼭 있다. 일정 비율로 있다.

“이건 법적으로 안돼요. 그 기준을 합격할 수 있게 고치지 않으면 적용이 불가능하다고요.”

“네, 그러니까 해주세요.”

“네? 이것 보세요. 저한테 이럴 것이 아니고 그건 그 팀에서 고쳐야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요.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두 눈을 뜨고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엉뚱한 것을 한다. 차라리 그가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물어 왔다면 조금은 어안이 덜 벙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회의실에서 ‘억지’를 쓰고 있었다.

그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입안은 쓰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이걸 위로라고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게만 억지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의 모든 팀을 상대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그래, 사람이 일관성은 있구나.) 그러니 당연히 그를 둘러싼 주변에서는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누가 봐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요구를 그는 희한하게 당당하게 했다. 그러면서 그 표정은 본인도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이니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동자견려도.png

그러다가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다. 김시의 동자견려도. 비단에 채색을 한 이 그림은 아이와 개울을 건너지 않으려는 나귀의 팽팽한 긴장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이의 얼굴에서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평수를 늘린 콧방울에서 그가 얼마나 심기일전하여 나귀를 끌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나귀도 만만치 않다. 다리를 보라지. 배수의 진을 치고 버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의 자세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아이는 엉덩이를 쑥 빼고 나귀도 이에 질세라 앞발, 뒷발로 버티고 있다. 이 둘이 말이라도 통했다면 아마도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면서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싸웠을 것이다.

이 둘의 무의미한(?) 싸움과는 상관없이 풍경은 참으로 잔잔하고 평화롭다. 시내를 흐르는 물소리가 들릴 법하다. 화면 상단의 소나무의 표현도 좋고 화면 아래의 검은 돌과 이름 모를 풀들의 조화도 좋다. 흑백의 농담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화가는 뭔가를 ‘깨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전경의 평화를 깨는 것은 아마도 아이와 나귀의 거친 숨소리뿐일 것 같다.

사실 둘은 서로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그냥 길을 걷는 것일 뿐이다. 시내를 건너는 것도 (떨어질 위험은 있으나) 산길의 연장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일도 아니다. 그러니 저렇게 똥고집을 피우는 나귀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나귀는 트라우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견 안전해 보이는 다리를 건너다 넘어진 기억이라거나 다리를 헛디뎌 크게 다쳤거나…… 하여간 모를 일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을 하다 보면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는 상황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동료가 많은 축복된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진정 행운이라는 것을 알고 동료에게 더 진심을 담아 잘해주는 것이 좋다.

의견 차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특히 다양한 부서가 협업하는 단계에서는 더 그렇다. 그래서 서로의 입장을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의 답답한 친구처럼 귀를 닫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하는 것으로는 일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야말로 싸움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갈 것이다.

조직생활은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다양한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다. 조직원이 해야 할 일은 다양한 방법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에 ‘근거’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냥 내 생각에 그런 것 같아서’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꼭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재우쳐 물어야 한다. 만약 이 과정을 건너뛴다면 같이 욕을 먹게 된다. 누구도 공동으로 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구성원이 되어 일을 한다면 본인이 납득할 수 있을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납득이 되었다면 최선을 다해, 성과가 날 수 있게 일에 임해야 한다.

다시 얘기를 돌려 동자견려도에 나오는 ‘나귀’처럼 말이 안 통했던 그는 결국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상대로 그런 일들이 숱하게 반복되어 여기저기에서 문제 제기가 되었고 선배 및 동료의 충고가 이어지면서 조금은 그런 문제적 태도가 수그러진 모양이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확률이 낮아졌다는 데에 안도감이 든다.

몰랐는데 김시의 아버지가 좌의정을 지낸 김안식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정적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악명을 높였다고 하고 드라마틱하게도 김시의 혼인날 잡혀가서 사약을 받았다는데 이게 실화라고 하면 역시 인생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집안의 아들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인생을 살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시는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인생을 살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 그렇게 밖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 않았을까.

이 비하인드를 듣고는 그림이 다시 보였다. 사실 이 그림을 봤을 때 ‘재미있다’라는 생각 외에 하필이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잇따라 떠올랐다. 마치 화가는 세상을 비웃는 것 같고(그렇잖아요. 정치인들이 싸우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의견 대립으로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과 죽자살자 싸우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관조하며 시니컬한 웃음을 띠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는 그림이었다.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은 상대를 만났을 때, 나의 말에 전혀 수긍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을 때에도 나는 이 그림을 떠올린다. 내 마음이 저 그림의 밑에 그려진 검은 돌처럼 새까맣게 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한숨을 일단 쉬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자위해본다. 그래도 상대가 나귀는 아니잖아. 말을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자리로 온다. 상대의 말이 수긍이 안 가는 것이 거의 백퍼센트지만 그럴 경우 일단 물러나서 서로 격해진 숨을 고르고 나는 차선책을 생각한다.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또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 진전이 있을 수 있다. 그가 의견을 꺾을 수도 있다.

네? 혹시 ‘나귀’ 같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냐고요? 일단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세요.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나 선배들과. 그리고 연합 전선을 펴십시오. 나귀는 사람과 진짜 말이 안 통할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