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것은

숲 속의 산책-앙리 루소, 1886년

by 루시

걷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어디든 잘 걸어 다닌다. 한 정거장 갈아타는 곳이라면 갈아타지 않고 걷는다.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 곳도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걸어 다니곤 한다. 그런 거리들은 내 경험상으로는 평균 2km 정도 되곤 한다.

대학교 시절에는 더 심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여름날이 있었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하겠지만 그때는 시간 부자였다. 할 일 없는 대학생, 편도 8km 정도 거리를 왕복하던 때도 있었다. 참, 할 일 없어 보이네요. 10리가 4km라고 하니까 나는 편도 2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던 거다.('리'라는 단위를 쓰니 전쟁 직후의 느낌이 스멀스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걷는 것을 좋아하는가. 걸어 다니면 차를 타고 다닐 때와는 다른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가게도 그렇고 거리의 풍경도 그렇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귀로 날아들고 차창 밖으로 보는 풍경보다 십만 배는 더 재미있다. 발을 딛고 걷는 느낌, 내가 살아 움직이는 그 느낌도 좋다. 물론 운동도 된다는 부가가치까지 창출된다.

도심에서 걷는 것도 나름 재미는 있지만 매연도 그렇고 아스팔트가 관절에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래서 내가 걷기 좋아하는 길을 역시 ‘숲길’이다. 기억에 남는 숲길을 말하라면 제주도의 ‘사려니 숲길’과 강원도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길’을 꼽겠다. 자작나무 숲길은 벼르고 벼르다가 2013년 가을에 갔었다. 웹상으로 보는 자작나무 숲길은 가본 적도 없는 북유럽을 연상시킬 만큼 청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가을의 자작나무 숲은 초록잎과 단풍이 어지러이 어우러져 있었다. 강원도의 깊은 산골, 그래서 기온은 도심보다 더 낮아 서늘한 느낌을 주는 가운데 하얀 나무 기둥을 드러낸 채 꼿꼿하게 솟아있는 자작나무는 선비의 기풍을 드러내고 있었다. 참으로 단아하면서 깔끔한 그 인상,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자작나무 숲이 북유럽의 서늘한 느낌이었다면 제주도의 사려니 숲길은 열대의 느낌이 묻어나는 숲길이다. 흙이 두텁게 깔린 바닥은 폭신하고 이리저리 가지를 자연스럽게 내민 나무들은 짙은 그늘을 선사한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전형적인 온대성 산지대에 해당하는 숲길 양쪽을 따라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는 울창한 자연림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한다. 역시 숲이 내뿜은 온화한 느낌은 온대성 산지대의 수목들이 발하는 기운이었구나.

꼭 이 두 숲이 아니어도 좋다. 각종 지방자치단체에서 선정한 둘레길의 숲길에 들어서면 도심의 길거리와 달리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운동이 되려면 빨리 걸어야 한다지만 숲길에서는 조금은 느긋한 마음이 들고 사색에 잠기게 된다. 세상사와 한 발짝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숲길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복잡다단한 일상에서, 신산한 인생사에서 좀 떨어지고 싶기 때문에.

앙리 루소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은 ‘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다소 무섭기도 한 그림의 분위기는 왠지 낯선 꿈을 꾸는 것처럼 다가왔다. 울창한 열대 밀림의 한가운데 소파에 전라의 여인인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밀림이기에 당연하게도 각종 동물들이 잠복해 있다. 사자며 코끼리, 흑인 여성의 피리 소리를 듣고 저어기 어디선가 ‘뱀’도 등장하고 있다. 보름달이 휘영청 한 밤, 여인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꿈은 상당히 이국적이면서 기괴하다. 자꾸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깔끔하게 무시한 원근법과 생생하면서도 자세한 숲의 표현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나의 기준으로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이 그림은 내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일까.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의 세월이 흘러 나는 그를 다시 ‘낙원의 캔버스(하라다 마하 저)’라는 책을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큐레이터로 일했던 바탕을 경험으로 소설을 풀어낸 작가의 모티프가 되었던 작가도 앙리 루소였다.

‘엥 여기서 다시 앙리 루소?’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한번 앙리 루소의 그림과 그에 대해서 찾아봤다. 세관 사무원이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엄청나게 성실했을 것 같다. 그가 즐겨 그린 정글의 모습도 전적으로 ‘상상’에 의지한 것이라고 하니 그 상상을 펼치기 위해서 각종 식물도감을 섭렵하고 식물원을 들락거리느라 바빴을 그를 생각하니 N 잡러의 숨가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정글 외에도 인물을 그린 그림도 있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때로는 비례를 ‘싹’ 무시한 채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잠자는 집시’와 같은 그림은 몽환적이면서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을 뿜어내기도 한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나에게 ‘묘하게’ 다가왔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생각을 자극한다. 아마도 좋은 예술작품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생각을 자극한다는 것,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길로 나를 이끈다는 것은 좋은 작품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forest-promenade_henri-rousseau__cutler miles gallery.jpg [from cutler miles gallery]

그렇게 그의 작품을 찾아보다가 나처럼 숲길을 산책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허리 잘록한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멋쟁이인지 같은 색의 양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다. 때는 초봄인 것 같다. 이제 막 여린 잎들이 가지에 달려 있고 아스라이 분홍빛의 봄꽃 무리가 원경으로 보인다. 그가 흔히 그리던 정글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어느 숲길을 산책하고 있는 것이다. 밀림에서 보던 억세보이는 녹음이 아닌, 여리디 여린, 한산한 느낌을 주는 숲길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이제야 움직일 마음이 든 여인은 홀로 숲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겨울의 쓸쓸한 느낌이 남아 있는 숲에서 순한 잎을 틔우는 나무를 보면서 생명의 위대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늘을 올려 보면 그 여린 잎과 봄날의 하늘이 펼쳐져 있어 여인은 산책을 나오기를 백번 잘했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집안에 있는 것보다는 역시 밖에 나오는 것이 진리였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진짜 좋은 것은 밖에 있다.

IMG_2087.JPG 종댕이길은 충주호를 본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삼복더위에 충주 ‘종댕이길’을 걸었다. 여름에 걷기 좋은 숲길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결정한 거였는데, 결론은 ‘역시 여름에는 걷지 말자’였다. 이렇게 비극적인 결론으로 치달은 데에는 무수히 많았던 벌레가 한 몫했다. 숲길이어서 그늘이 진 것은 좋았으나 모기와 파리와 날벌레들 수백 마리가 걷는 내내 나를 에워쌌다. 이건 걷는 건지 벌레를 물리치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30분 만에 포기. 이래서 여름에는 그냥 물가에서 비치파라솔을 꽂고 선베드에 누워있는 거로구나. 많은 이들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며 삼복더위에는 절대 숲 근처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 하지만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상황이 좀 다르려나? 입추에 말복까지 지났으니 이제 조금만 더 숨죽이고 기다려보자. 숲길을 걷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