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빈센트 반 고흐, 1887년
너무 더운 여름은 미스터리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읽기에 안성맞춤인 계절이다. 물론 일 년 내내 미스터리 소설류를 읽고 있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확실히 체온 절감 효과는 있다고 느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름철에 시원하기보다는 겨울철에 춥다고 느끼는 빈도가 월등히 높다는 점이지만, 겨울에 추위를 느낄 정도니 여름에 시원하지 않다고 해도 내 몸 어딘가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그야말로 천재 중에 천재, 마치 추리소설 자판기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가다. 어떻게 이런 재밌는 이야기를 끝도 한도 없이 풀어내는 것인가. 진정 그는 인간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 맞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출생연도는 1958년도. 나는 항상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공학도였던 경험에서 나오는 과학적인 트릭도 흥미롭고 삐딱하고 까칠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든다. 그의 작업실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공방처럼 수하에 여러 명의 문하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본적인 뼈대와 캐릭터를 히가시노가 설정하면 밑에서 살을 붙이고 디테일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항상 궁금하다. 그의 다작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저절로 고개를 든다. 기술에 관심이 많으니 그가 AI와 공동 집필이라는 것을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한 달에 한 권씩 책이 나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가 되었든 나는 그의 다작을 기원한다. 한 달에 한 권씩 재미있는 소설책을 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미야베 미유키도 좋아하는 작가다. 그녀의 에도 시리즈를 읽고 있노라면 시간 여행을 하고 에도의 어느 나가야(서민 공동 주거지)에 들어앉아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가 사람의 혼을 흠뻑 빼놓는다. 물론 모방범과 같은 책도 재미있고 스기무라 탐정 시리즈도 재미있다. 동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내면서도 어느 순간 과거로 확 회귀해서 역사의 스냅샷을 잡아내는 그녀의 책을 읽노라면 능력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마디로 그녀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에 나는 항상 그녀의 신간을 기다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의 다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권 이상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미미 여사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알려진 그녀도 1960년생. 아, 부디 건강하소서.
그 외에도 오쿠다 히데오, 하라다 마하,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다 슈이치 등 일본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작가들의 출간작을 모두 읽고, 이제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있지만, 이게 또 생각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름엔 북유럽이지. 스티그 라르손 밀레니엄 시리즈랑 어쩌고저쩌고.
속독을 하는 친구는 고맙게도 기억하기도 어려운 작가의 이름을 미주알고주알 알려주었다. 적어둔 노트가 회사에 있어서 여기에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이로써 나는 작가 발굴의 지난한 작업에 잠시 쉼표를 찍고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손을 뻗었다.
북유럽을 가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강렬하다.(어디든 가고 싶어 하는 주제에 이렇게 써 놓으니 북유럽만 가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요 네스뵈 역시 이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리 홀레 시리즈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노르웨이 작가는 옆 나라 일본 작가와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두 나라가 떨어져 있는 만큼의 차이가 느껴졌다. 해리 홀레라는 매력적인 형사 캐릭터를 가가 형사만큼이나 좋아하는데 가가 보다 더욱더 인간적이다. 실수하고 술에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요 네스뵈의 다른 소설보다는 역시 해리 홀레 시리즈가 그의 인생작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평균으로 치면 요 네스뵈보다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가 우월하지 않을까.)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노르웨이 피오르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약물에 쩔은 오슬로가 떠오른다. 폭력도 폭력이지만 약물이 일상이 된 도시. 그게 해리 홀레가 활약하는 도시의 배경이다.
하지만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이 펼쳐 보이는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고는 더 기함을 토했다.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비하면 ‘말랑말랑한’ 수준이었다. 스웨덴은 그야말로 하드코어다. 폭력도 성범죄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까. 스웨덴의 스톡홀름이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하드코어를 그려낼 수 있는 도시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급사했다는 스티그 라르손의 사진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나는 친구 덕분에 여름의 끝을 북유럽 하드코어로 신나게 정주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우정아 교수님의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을 주제로 쓴 칼럼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 보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물론 처음 본다고 해도 그림에는 반 고흐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작가를 알아내는 데는 누구라도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몰랐었는데 반 고흐 역시 엄청난 애독가였다고 한다. 정신병원, 고독, 친구 없음- 애독가가 되기 쉬운 환경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 소설도 많이 읽은 모양이다. 밤의 테라스처럼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이 그림에는 탁자 위에 어지러이 소설책들이 굴러다니고 있다.(벽돌처럼 두께가 대단한 북유럽 책은 없군요.) 마치 조각칼로 새긴 것과 같은 목판화의 느낌이 나는 것은 우끼요에를 모방한 결과라고 한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노란 책’은 날카로운 눈으로 냉정한 세상의 이모저모를 그대로 옮겼던 프랑스 소설의 대명사였다고 하니 노란색을 많이 사용했던 반 고흐의 선택이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 고흐에게 세상은 특히 냉정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의 실력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의 열정도 광기로 몰아가는 현실 앞에서 그는 조각칼로도 새길 수 없는 깊고 깊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만 놓고 보자면, 따뜻하다. 느긋하게 여름휴가를 소설책으로 대신하고 있는 누군가의 일상이 그려질 법도 하다. 장미 한 송이 꽂아놓은 테이블에 앉아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이 책, 저 책을 탐독하며 소설이 주는 재미에 흠뻑 젖어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는 호사. 특히 요즘처럼 어디를 돌아다니지 못하는 때에는 제격이다. 저 테이블 위에 프랑스 소설이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간 열 권, 북유럽 하드코어 미스터리 열 권, 이렇게 있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