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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Dec 25. 2020

"예쁘네, 오늘도"

천리포수목원의 브랜딩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리포수목원.

이 말을 듣고 나는 당연히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선정한 거야?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예상한 대로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선정한 것인지, 어떤 근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만이 오롯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이 많은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 살랑 저리 살랑대는 팔랑귀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보기로.

그렇지만 장거리를 잘 안 움직이는 나로서는 또 가는 것이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충청남도 태안군에 위치한 그곳까지는 여기 서울에서 3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그래서 나는 또 몇 년을 마음만 먹은 채로 흘려보냈다.


올해 봄에 코로나를 이유로 국내 여행지로 눈길을 돌리면서 '가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화담숲을 가느라 뒤로 밀리고(물론 이때도 가는 거리가 짧다는 이유로 천리포수목원이 화담숲에 의문의 1패를 한 거였지.) 추석 다음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천리포수목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름다웠다. ‘가장’ 아름다웠냐고 누가 묻는다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굉장히 많으므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한 개만 고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미의 극치로 다가왔던 화담숲과 인공미와 자연미가 뒤섞인 가평 더스테이 힐링파크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고르라고 한다면 천리포수목원이었다.


왜?

'예쁘네, 오늘도'

사실, 이 단순한 문구 한마디에 나는 매혹되었다. 

이 문구를 발견한 것은 수목원을 들어서서 연못을 끼고 천천히 걷다가 발견한 ‘안녕, 나무야’라는 카페 안에서였다. 하얀 벽에 그 문구가 홀로 도도히 조명을 받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예쁘네, 오늘은' 이 아니다. 

'예쁘네, 오늘도'이다. 

‘도’라는 조사가 주는 편안한 인정의 느낌. 천장에서 내려온 말린 짙은 핑크빛 안개꽃 아래에 자리 잡은 그 문구.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흔들리고 말았다. 못이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커피를 주문하는 것도 잊었다. 


같이 온 사람을 보고 그렇게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 수목원 전체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예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문구로 말미암아 나의 하루도 예뻐진 것만 같았다. 행복감이 차오른다. 

아마도 브랜딩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업. 

만약 그 자리에 카페의 이름인 ‘안녕, 나무야’라는 문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처럼 내 마음에 큰 진폭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서는 강력한 브랜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야외 벤치로 나왔다. 마음에는 '예쁘네, 오늘도'라는 문구를 새긴 채로. 

그랬기 때문에 당연히 커피도 맛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서글서글한 좋은 성격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할 말을 잊고 불어오는 바람과 오늘도 예쁜 것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 문구를 수목원 카페의 벽면에 넣을 생각을 했을까? 

본질과 닿아 있지 않을까? 

수목원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을까? 나의 경우 주 5일을 인간의 숲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주말이면 자연을 벗 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말을 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바다보다는 숲이나 나무를 좋아하는데 녹음이 주는 상쾌함과 바람이 흔들고 지나갈 때 기분 좋은 서걱거리는 소리와 깨끗한 공기가 정신을 어루만지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자연 앞에 서면 그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도 감동을 받게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보다도…                                          

Bigger Trees near Warter, from BBC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속으로 되뇐다. 그 마음을 포착한 것이 아닐까. “예쁘네, 오늘도”라는 문구는. 그래서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것 같았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식물원과 수목원과 카페가 있다. 그리고 나름의 차별화 포인트를 찾아내기 위해서 고심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이 없다고. 이미 많은 쟁쟁한 카페가 있고 수목원이 있고 식물원이 있으니 이렇게 작은 규모의, 작은 예산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 하지만 브랜딩은 본질과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디테일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요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되레 항상 돈이 없으니 크리에이티브해진다는 것을 믿는다. 

모네의 수련보다 아름답지 않나요?

사실 천리포수목원은 그 탄생부터 범상치는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가 사재를 들여 평생을 바쳐서 조성한 식물원이라는 탄생 스토리부터가 이미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후 그는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며 16,000여 종의 식물 수종이 자라는 세계적인 규모의 수목원으로 가꾼다. (‘식물 전문가도 아닌 그가 국제적인 수목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식물에 대한 열정과 노력, 헌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홈페이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고 있노라면 같은 싱글로서 뭔가 찔리는 것은 그냥 나의 자격지심이겠지?) 하지만 천리포수목원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가보면 알 수 있다. 포인트마다 있는 벤치나 포토존의 작은 디테일이 방문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고심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특히 카페 문구의 디테일에서 남다른 감동을 만들어낸 천리포수목원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했다. 다시 방문했을 때에도 ‘예쁘네, 오늘도’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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