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 Dec 30. 2020

디자인 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발 요인과 현실 처방

세상에는 매혹적인 작업들이 많이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렇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뜨개질을 하는 것도, 그리고 본인이 살 집을 짓는 것도 그런 작업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이 작업들의 공통점은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든다는 것이 우리를 이토록 매혹하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다. 뭔가를 창조할 때의 짜릿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산 넘고 물 건너 다다른 결론은 이렇다. 

만든다는 행위는 세상에 없던 나만의 무언가를 내놓는 일이고 이건 결국 창조주와 우리를 같은 위치에 올려놓는 것과 (스케일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등가’의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어깨가, 너무 많이 올라갔나?)

아아, 여기저기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에이, 무슨 쿠키 하나 만드는데 창조주를 논합니까?’

캐릭터 있어 보이지 않나요? 캐나다 오타와의 le moulin de provence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자신만의 신념과 생각과 철학이 녹아들기 마련이고 그것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의 명징한 세계관을 표상하는 거라고 말해줄 거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나만의 생각’을 담아내는 것이다. 

특히 ‘디자인’이라는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보다 쉽게 나만의 생각을 어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매력도가 더 높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매력도는 높지만 난이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더 높다는 사실이 항상 어려운 포인트이기는 하다.(왜 한 숨이 나오지? 응?)

난도는 높지만 전문적인 영역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자질이기도 하기에 조직 내에서 ‘디자이너’의 위치는 독보적이다.(맥 컴퓨터의 위용도 그렇고.) 아무튼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있어서 이들의 손을 마지막에 거치지 않고서는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부탁을 해오는 것을 보고 있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저자세는 기본이고 작은 뇌물도 서슴지 않는다. 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루는 노하우가 있지 않고서는 이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숙련된 스킬 셋으로 텍스트만 있던 살풍경한 아웃풋에도 감정을 담아낸다. 단순히 일러스트나 그림이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디자이너는 텍스트만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내니까. 하지만 조직에 속한 디자이너는 개인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에 비해서 고려해야 할 점이 더 많다. 

나는 지금 이 디자인 작업을 왜 하는가?

이 부분을 정신 바짝 차리고 디자인 작업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잡고 있어야 한다. 

왜? 

업무를 하다 보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게 된다. 보고에 보고를 거듭하면서 이 부분을 조금 고치고 저 부분도 이런 식으로 수정한다. 또 보고 자리에서는 모두 한 마디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헤드들이 한 마디씩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팀의 헤드가 이런 의견을 내고 저 팀의 헤드는 저런 의견을 마구잡이로 준다. 그야말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태초의 빛이 없는 혼돈의 상태로 내몰리게 된다. 수많은 수정 사항과 요구 사항을 접하면 사람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게 마련이다. 이때가 디자이너로서는 위기다. 이 복잡다단한 수정 요구사항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 나중에 결과물은 맨 처음 해결하려고 했던 포인트와는 정반대의 결과물이 나올 확률이 높다.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보고하면 당연히 조직의 반응은 이럴 것이다. 

“이거 왜 이렇게 된 건가요? 뭘 표현하려고 하는지 명확하지도 않고...... 이거 이래서 기한 내에 디자인 완료할 수 있겠어요?”

차라도 한 잔 한다면 더 좋다.(딴소리지만, 미국보다 한국 블루보틀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여기서 정지하는 작업, 한 템포 쉬어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머릿속이 백지로 변했겠다 이럴 때 일단 심호흡 한번 한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보고가 잘 안 끝나고 엉망진창이 되었다면 나는 산책을 권한다. 

천천히 걸으면서 (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잠시라도 사무실과 다른 공간의 공기를 마시고 다시 돌아오자. 

그리고 자리에 왔으면 맨 처음 이 디자인 작업이 시작된 이유를 다시 한번 숙고해봐야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이었을 수도 있고 신규 서비스나 제품이 론칭되어 그에 수반되는 디자인 개발 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문제를 명확하게 할수록, 신규 서비스나 제품의 타깃과 차별점을 명확히 할수록 좋은 디자인 결과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예상하셨겠지만, 의뢰를 해올 때 요청 사항을 명확하게 해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는 동그라미를 해보고 싶어요.’ ‘저는 네모가 좋아요.’ 식의 개인 취향으로 요구사항이 정리되어 있다면 머릿속의 빨간 신호등을 켜야 한다. 디자인이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업무가 진행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동그라미나 네모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당면한 디자인 과제가 그런 취향의 영역에서 해결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취향의 영역에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맨 처음 디자인 과제를 정의하는 작업은 중요하며 디자인 작업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디자인 작업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명확히 해오라고 주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켈란젤로가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설계한 도서관의 계단. 어떤 주문이었을지 궁금해지는 유려한 디자인이다.

그리고 의뢰받은 디자이너는 디자인 작업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보다 결과물의 완성도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작업할 때, 보고 후 재앙 상황의 돌파구는 찾아지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그래픽적으로 예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그래픽의 영역에만 머무를 때 디자인 보고 후 찾아오는 혼돈의 상황을 정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혼돈의 보고가 거듭되면 프로젝트는 산으로 가고 디자이너 본인의 멘털은 털리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요하게 물어라.

제시된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의 답변을 듣고 있으면 방법이 수월하게 찾아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만약 이 디자인 과제의 핵심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시해도 좋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면, 그 의견을 제시한 사람에게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의견을 얘기했는지 되물어야 한다. ‘그냥 제 생각에’라고 그가 답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당신의 의견과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싫어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반대한다면 이 부분이 디자인적으로 해결할 과제였는지를 먼저 짚고 다음에 그 의견에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대표한테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볼 수 없다고?(어머, 당신 저랑 같은 새가슴이군요......)

하지만 솔직히 디자인에 있어서는 디자인 업무를 하는 당신이 대표보다 전문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기죽을 것 없다.

우리는 모두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각자의 본분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대표님이라면 보고 전, 디자인 과제를 착수하고 실무를 진행하면서라도 디자인 작업을 의뢰한 팀에게 집요하게 디자인 과제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계속 물어야 한다. 얘기를 하다 보면 대표의 생각과 회사의 방향성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떨어진 과제를 명확히 한 후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한 나만의 생각을 디자인 작업에 불어넣어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텍스트도 일러스트도 도형도 유령처럼 당신의 눈 앞에서 떠다닐 뿐이다. 

예전에 야구를 좋아하는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외야수가 실수하는 것은 생각을 덜했기 때문이라고. 공이 어디로 떨어질지, 저 타자가 어떤 배팅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실수로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인생이, 매일매일이 생각의 연속이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지 잘 생각하자.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재미 삼아 한 번 정리해봤다. 우리 모두 피스~

포디움 디자인 그룹에서 운영하는 프로퍼 커피 바. 역시 다르죠?
디자인 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발 요인

보고에 상관없는 사람들(가장 위험하다. 게다가 직급이 높다면 ‘핵’ 위험인자다. 왜냐하면 디자인 과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느낌을 나열하는 사람들(왜 그런 느낌 있잖아. 네? 뭐라고요?)

할 말을 하지 않고 입 다무는 사람들(명확한 과제가 있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서 필요 없는 것들은 이미 1차 리뷰에서 걸러서 fine 본으로 보고하는 거잖아요?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죠?)

디자인 과제와 상관없는 개인 취향의 얘기들(개취는 사석에서 부탁드립니다. 꾸벅~)


디자인 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극복 현실 처방

[시계열 순으로 정리해봤다.]

일단 심호흡을 한다.(바로 부르르 하지 말자. 뒷목 잡지 말자. 나는 소중하니까!)

공기를 바꿔준다.(이 무겁고 패배한 분위기의 사무실을 떠나자. 잠깐 건물 한 바퀴라도 돌고 오자.)

맨 처음 받았던 디자인 요청서나 브리프를 다시 본다. 무엇이 디자인 과제였는지 명확히 되짚어 보자.

다시 디자인 시안을 본다. ‘디자인 과제’가 명확해지면 오늘 보고에서 나온 얘기 중에 쓰레기와 진주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상 집요하게 물어라. 묻는 것은 진정 용기 있는 행위이다. 묻지 않는 것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많이 물을수록 나도 상대방도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생각은 우리 모두를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예쁘네, 오늘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