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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May 14. 2022

이상 야릇, 알듯 모를 듯, 대가의 길

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3~1506년경

피사를 가? 말아?

이탈리아 지도를 앞에 두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마 예전 같으면 탑 하나 보자고 거기를 간다고? 가뿐히 패쑤~했겠지만.

옆으로 기우뚱 서 있는 그 탑,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실험으로 유명해진(실제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탑의 위태로운 모습이 마음에 들러붙어 나를 유혹했다. 

중세의 사탑이라 아직도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다고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관광객의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지? 음, 그렇다면 더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피사의 사탑은 피사 대성당에 딸린 부속 건물이다. 1173년 착공되어 1372년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니 상당히 긴 시간을 공을 들여 지어진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1173년에서 1178년 사이에 진행된 1차 공사 이후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기울어짐이 발견되었고 그 뒤 2차 공사에서 이를 수정하였으나 기우는 현상은 계속 지속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차 공사가 진행되고 나서 공사 담당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싶다. 이미 기반은 닦았을 것이고 토질의 불균형을 개선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부지를 선정해서 건축을 하지 않는 한.(물론 아닐 수도 있다;) 흰 대리석으로 올라갈 눈부신 종탑의 모형도 앞에서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탈리아의 천재들이 중지를 모았는지 종탑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서서히 기울어지다가 1990년 이탈리아 정부에서 다시 10년에 걸쳐 보강 공사를 한 후에 2008년에는 기울기 각도가 약 5.5도에서 멈췄다고 하는데 지금은 더 기울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두산백과사전 참고)

8층의 원통형 건물로 정확한 기울기 각도를 몰라도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 신기한 건물, 저기를 가야 할지 일정에서 빼야 할지 나는 한참을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20대였다면 하지 않았을 결정을 내렸다. 그 한 개의 건물을 보기 위해서 피사에 들르기로.

고맙게도 세계의 유명한 도시들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경우가 많고 그 역사의 길이만큼의 명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웬만한 도시를 들르면 유명한 건축물이며 유적을 모두 망라하게 된다. 하지만 피사의 사탑처럼 아주 유명한, 아이코닉한 유적을 한 개만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한정된 시간 여행자의 경우여서 그렇다. 나는 시간 부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에 피사를 넣었다. 그 ‘기우뚱’한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그 위태로운 모습에서 어떤 심정적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도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피사에 도착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받은 일요일 아침의 피사는 겁나게 조용했다. 인적이라고는 광란의 토요일의 흔적을 처리하는 청소부가 전부였다. 괴괴하기 까지 한 피사의 아르노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 (아르노 강변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상당히 이쁜이었음) 발길을 재촉했다. 

평화로웠던 아르노 강변

그리고 주민들의 거주지 사이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피사의 사탑. 과연 이리로 가면 피사의 사탑이 나올까 싶게 거주 골목 사이를 빠져나가자마자 있었다. 축구의 서든 데쓰처럼 갑자기 경기가 끝나버린 느낌으로 피사의 사탑이 훅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이거 하나를 밖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피사라는 도시의 가치가 충분히 있고도 남아도는 것을 깨달았다. 초록색 잔디와 기울어진 하얀 사탑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절묘했다. 토질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기울기는 그야말로 미스터리했다.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넋을 잃고 아침 햇살에 고고히 서 있는 그 피사의 사탑은 뭐랄까, 너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잖아 라는 주변 건물들의 험담을 전혀 개의치 않는 기개가 있었다. 주변의 수군거림이나 빈정거림에 절대 기우뚱할 사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 역시 20대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는데 기울기가 있어서인지 똑바로 걷는대도 몸이 자꾸만 기울어져 벽에 부딪쳤다. 홀로 간 여행지에서 계단 하나 제대로 오르지 못한다는 서러움이 복받치면서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희한한 일이죠?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행 이후로 나는 절대 홀로 여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 뭔지 모르게 너무 서러워서. 

피사의 사탑처럼 모나리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루브르 박물관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역시 20대였던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가볍게 루브르의 긴 줄을 스킵했다. 하지만 피사의 사탑을 보면서 나는 모나리자를 생각했다. 아마, 피사의 사탑을 보는 것 이상으로 모나리자를 앞에서 본다면 전율을 느낄 것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모나리자. 피사의 사탑보다 더 유명하면 유명했지 덜 유명할 리 없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나리자가 왜 티슈 브랜드가 되었을까.) 책에서 모나리자를 처음 봤던 10대 때에 나의 감상은 이랬다.

애개

진짜 이게 뭔가 싶었다. 딱히 예쁜 것도 아니잖아? 모나리자의 미소? 이게 신비로운 거야?

어린 나의 눈에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었던 셈인데 그 ‘애개’가 경외감으로 바뀐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모나리자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부드럽다. 윤곽선을 날카롭지 않게 표현한 스푸마토 기법으로 인하여 얼굴 전체에 온화함이 묻어난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니 관상학적으로 돈이 모이는 입술이로군요. 헤헤. 눈썹이 없어서 더 오묘한 느낌을 주는 것도 같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리자는 잘 웃지 않는 여자였을까? 차갑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여인? 지금의 저 웃을 듯 말 듯한 것도 그녀의 기준에서 보면 아주 ‘활짝’인 것일까? 선원근법이 아니라 대기 원근법으로 표현된 뒷배경도 그녀 만큼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전기(傳記) 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다 빈치는 천재다. 건축, 철학, 수학, 예술 등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전인적인 르네상스 인이었다. 비밀스러운 문서는 반대로 쓸 정도의 천재성이 드러난 문서를 봤을 때에는 그야말로 기함을 토했다. 진정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의 머릿속은 항상 오만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나리자를 그리면서도 성당의 건축을 생각했을 것 같고, 성당을 지으면서도 무기 제조에 대해서 골몰했을 것 같다. 그러니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그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만 같다. 수시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찰나를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했다가 저 일을 하고 그것을 만들다가 요것을 손댈 수밖에 없는 것이 천재의 숙명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완성품으로 보인다. 다빈치 역시 화폭에 살아난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드디어 완성되었다고 흡족해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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