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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Apr 23. 2022

교만이 눈을 가릴 때

바벨탑-피테르 브뢰헬, 1563년

그녀는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아우라를 내뿜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움은 12층 빌딩의 옥상을 뚫고도 남을 것 같았다. 작은 키를 만회하려는 듯이 항상 킬힐을 신고(허리를 무지 보호하는 나는 그저 허리가 튼튼할 것 같은 그녀가 부러울 따름이다.) 신고있는 그 킬힐 역시 범상치 않아 보였다. 유려한 선하며 구두굽의 날렵함이 딱 봐도 ‘흠 돈 좀 들였구나.’ 싶은 것들이었다. 그녀의 신발장에는 크리스천 르부탱이며 마놀로 블라닉 같은 구두들이 촤르르 자리를 잡고 있을 것만 같았다.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머리 회전도 열나 빨랐다. 가만히 있어도 ‘휙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천성적으로 느긋한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이기도 하다. 본인의 날카로움을 숨기기 위해서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이래저래 웃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본성은 숨길 수 없다. 게다가 감정의 높고 낮음이 심했다. 최최최악인건가. 아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결같은 윗사람은 만나기 힘든 법, 그렇게 일반화하고 넘어가고만 싶다. 나이가 어린것에서 오는 불안감이나 콤플렉스가 있는지, 아니면 타고난 승부사인 건지 ‘지고는 못살아’가 그녀를 거쳐간 설전에 참전한 참전자들에게 그녀의 성향으로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래, 지고 못 사는 것도 잘 살리면 좋은 자질이지. 이렇게 고개가 자꾸 가로저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끄덕임으로 바꾸면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만 있으면 다행이게? 다른 여인도 있다. 그녀만큼이나 지기 싫어하고 그녀보다 더 다른 사람의 말을 안 들으며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한마디로 주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는 여인도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야, 다들 그만 안 해?’라고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싶지만, 이건 주로 마음속의 외침으로 끝나고 만다. 내 마음은 방음이 잘 되는 것에 감사하며, 또한 마스크에 감사하며 그녀들이 참석한 회의에 들어간 날은 신경이 너덜너덜해짐을 느낀다. 그녀들과 하는 회의가 일주일에 한 번, 정기 회의체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날은, 그래서 뭔가 탈출구가 필요한 날이기도 했다.

매주 오전에 한 시간씩, 물론 그 회의는 한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그녀 둘에 플러스 또 다른 여인도 달려들기 때문이다.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다른 갤러리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눈짓으로 서로의 멘털을 확인하며 마스크 안에서 답답한 한숨을 내쉰다. 회의가 발전적이지 않은 이유는 감정을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안다. 인간인 이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친절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준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이 짧아진다. 굳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회사라는 이익단체에서 그렇게 감정만으로 일을 할 수는 없다. 사업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결국은 업무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요즘은 다양한 곳에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설득을 위해서는 다양한 소스로 설득 논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쓸데없는 감정싸움은 하지 말고, 감정은 제발 집에 놔두고 출근하라고 소리치고 싶다.

[from : wikimedia commons ]

그녀들의 아비규환을 듣고 있으면 나는 살짝 정신 이탈하여 이 그림이 생각난다. 피테르 브뢰헬이 그린 ‘바벨탑’. 바벨탑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인간의 교만에 대한 우화이다. 오만해진 인간은 인간의 능력으로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신에게 닿고자 했고 이에 분노한 신이 그때부터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를 다르게 하는 벌을 내렸고 인간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며 불신과 불통의 늪에 빠져 바벨탑 건설은 산으로 가고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되겠다. 

어쩌면 구약성서 시대부터 인간의 본성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잘 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거기에 가속이 붙어 결국은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본인의 생각만으로 하늘에 가 닿으려 한다.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불통의 상황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어도 종종 발생한다. 특히 ‘나 잘 났거든?’이라는 아우라는 뿜는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그림의 바벨탑을 좀 보라지. 상당한 높이로 건설 중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층마다 어떤 곳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건축의 방식도 서서히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을 반영한 것인지 통일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일견 통일되어 잘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제각기 공들였다 하더라도 그 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협업으로 탑을 쌓으면서도 전체 구조를 조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조직은 함께 가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 협업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런 성향은 심해지는데 아마도 그 정도 지위가 높아지면 어느 정도의 독단과 독선이 그를 추동한 한 가지 힘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하지만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협업은 필수다.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한다. 내 생각이 옳다는 오만한 생각을 좀 내려놔야 한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면 조직원과 함께 달리기는 엄청 어려워진다.

좌측 하단의 왕이 그래서 우스워 보인다. 결국 오만과 교만이 탑의 건설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인데 그는 아직도 발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지위하고 있다. 무너질 탑을 보지 못하고 아직도 교만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서운 그림인가. 

이번 주 정기 회의에서는 그들은 얼마나 교만을 걷어내고 회의에 참석할까. 불통이 아닌 소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위태로운 바벨탑을 유심히 관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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