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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Apr 16. 2022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입맞춤-구스타프 클림트, 1908년

빈도로 보자면 한국 영화보다는 영미권 영화를 보는 빈도가 높다. 이유?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나를 아주 낯설고 먼 곳으로 데려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영화는 언어에서부터 나의 이런 바람을 충족시키기에는 꾀나 괴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낯선 것이 좋다면 영미권 영화보다는 언어도 낯선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중동의 언어를 쓰는 영화를 보는 것이 훨씬 낯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면 또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일말의 알아들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이 있으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살짝 배가 되는 것이 있어서 생판 모르는 언어보다는 영미권 영화를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한국 영화는 훌륭하다. 살인의 추억을 본 이후부터 어서 빨리 봉준호 감독님이 박찬욱 감독님을 누르고(유치하게 말이죠.) 대한민국 원탑으로 서기를 남몰래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기생충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는 감독님이 되었을 때에도 너무 당연한 귀결이라고, 아니 너무 늦게 세계가 알아본 것이 아니냐며 혼자 분통을 터트렸다.

이 외에도 걸출한 영화감독님들은 많다.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김지운 감독님, 액션 감칠맛 류승완 감독님,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님도 훌륭하고 최근에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해진 황동혁 감독님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 늘어놓고 보니 이 분들, 영화에 출연해도 될 정도로 멋있기도 하다. 배우와 같은 잘생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개인에 따라서는 이것도 가능할 듯) 뚜렷한 자기주장을 가진 사람만이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를 모두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이 멋을 퐁퐁 풍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상수 감독님도 빼놓을 수 없다. 참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감독님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는 철저히 우리 현실의 민낯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내 지인은 그것을 보고 있기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나에게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 찌질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음. 그런가.

확실히 그의 영화를 보면 사랑에 목을 매고 작은 것에 찌질하게 집착하는 인간 군상이 즐비하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런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겉으로는 아닌 척, 대학교수 등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이면을 살짝만 들추면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아닐까.

생활의 발견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 뭐 이런 영화가, 이런 반응과 함께 그 통속적임에 자석처럼 이끌린 관객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가 예지원 님이 연기한 명숙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하다며 갑자기 춤을 추며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기도 하고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심심한데 뽀뽀할까요?’라고 난데없이 음식점에서 뽀뽀를 청하기도 한다.

우와 이런 캐릭터라니, 그야말로 생뚱맞음의 최고봉이요 이것저것 재지 않고 본인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뚝심이랄까 그런 것이 예지원 님의 연기를 통해서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녀는 왜 난데없이 뽀뽀를 청했을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남자와 함께 하는 술자리. 손을 은근히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각설하고 뽀뽀 한 번을 요구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교감을 나누고 관계가 깊어지면 당연하게도 육체적인 접촉이 일어난다. 손을 잡고 어깨를 부여잡고 허리에 팔을 두르기도 하고 포옹을 하면서 나와 다른 이 객체와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고 확신하기도 한다. 물론 모두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것도 한낱 뇌 속의 화학물질 작용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접촉 중에서도 ‘뽀뽀’는 전술한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접촉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그야말로 서로의 숨결을 완벽하게 공유하는 행위, 상대의 타액까지도 사랑스럽다고 받아들이는 경지, 그래서 이것은 당연하게도 ‘미친 짓’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군가와 뽀뽀를 하기 시작하면 주변은 모두 blur처리가 되고 상대의 숨결과 몸짓에만 120% 집중하게 되는, 대단한 황홀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난생처음, 만나본 적도 없는 정신세계의 고양을 만난 순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교감의 절정, 입맞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첫 키스를 하기 전에 이 그림을 봤을 때에는 그다지 큰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입맞춤은 이런 것일까? 상상하는 정도? 황금색으로 둘러싸인 남녀. 남자는 고개를 숙여 여자에게 키스하고 눈을 꼭 감은 여자는 그 열락의 순간에 온전히 몸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빛나는 순간이다, 입맞춤을 하는 순간은. 당사자들에게 그렇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연인은 꽃밭에서 소중한 순간을 음미하고 있다. 하지만 여인의 발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의 위험함을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꽃밭 아래는 절벽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실연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남자의 목을 꼭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본질은 불안정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영혼을 공유한 것처럼 들떠 있다가도 사소한 오해 하나로 사랑은 파괴되기도 하고 연인은 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입맞춤을 열렬히 하고 있다가도 자칫 잘못하면 상처 투성이의 가슴을 부여잡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 연인 관계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기에, 지금 이 입맞춤은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에 그들은 지금 눈앞의 상대에 더 열중한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입맞춤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과 작은 몸짓에 온 마음을 다 싣는다. 황금보다 빛나는 상대에게, 황금보다 소중한 상대에게 집중한다. 이 입맞춤 후에 설사 상대가 나를 밀어 절벽으로 떨어뜨린다 할지라도 지금은 이 지상 최고의 행복에 집중하련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유채와 금으로 그린 것이니 실제로 본다면 상당히 ‘블링블링’할 것이다. 주렁주렁 금 발찌를 발목에 걸치고 황금으로 장식한 커플룩을 입고 황금 망토로 서로의 몸을 감싸고 사랑을 나누는 그들은, 자본주의 시대의 행복한 커플이 아닌가. 멍한 눈으로 나는 그들의 황금빛 입맞춤을 홀린 듯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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