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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May 29. 2024

극적인 드라마

거기에 인생이

마라톤도 넋을 놓고 보는 나는, 운동권이다.

운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보는 것 또한 살 떨리게 좋아한다.

그래서 올해는 황홀하다.

곧 올림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지금은 프랑스 오픈이 한창이다.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긴 랠리도, 강력한 스트로크도, 박력 넘치는 발리도, 허를 찌르는 드롭샷도

그 어느 것 하나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남자 선수들의 경기를 더 좋아하는데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한정된 시간 관계로 모든 스포츠를 섭렵하지는 못한다.

타이거즈가 성적이 좋을 때에는 야구에 집중했고(올해도 봐야 하나?)

골프에 흥미가 있으면 골프를,

육상계에 걸출한 선수가 나오면 또 육상을 보는 식이었다.

테니스도 꾸준히 봐온 것은 아니고

페더러, 조코비치, 나달 등 유명 선수들의 플레이를 곁눈으로 힐끗거렸다.

채널을 돌리다 테니스가 라이브 되면 멈출 수밖에 없는 매력을,

테니스는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우연히 하노이에서 잠 못 들다가 프랑스 오픈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챙겨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년 전부터 '알렉산더 즈베레프'라는 독일의 훤칠한 선수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무려 키가 198cm에 이르는 그는 펜슬처럼 마른 몸매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더해져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뭔가 짐작이 가지 않나요?)

크게 성장하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은 들어맞았다.

하지만 하노이에서 시청한 것은 즈베레프의 경기가 아니었다.

나에게 홀연히 나타난 홀게르 루네와 캐스퍼 루드의 경기였다.

이들은 그때 처음 봤는데 북유럽 라이벌 국가(덴마크 vs 노르웨이)의 그야말로 young gun들이었다.

홀게르 루네는 그 옛날의 리키 슈로더라는 배우를 닮은 금발 미남으로

나이키 유니폼마저 예쁘게 차려입었다.

루드도 나이키 유니폼이었는데 음, 왜 같은 나이키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나

싶을 정도로 패션에서는 점수를 줄 수 없는 지경.

여하튼 작년의 프랑스 오픈에서 나는 보았네.

야닉 시너의 어마 무지 큰 구찌 테니스 가방과 세대교체를 예고하는 젊은이들의 파도를.


퇴근길 본 기사에서는 부상으로 탑 시드를 받지 못한 클레이코트의 강자 흙신 라파엘 나달과 

세계 4위 즈베레프가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1라운드에서 나달과 즈베레프라고? 준결승 각이네.

퇴근해서 노닥거리다 뭔가 이상해서 TV를 켰더니 그 둘이 1세트 경기를 하고 있었다.

롤랑가로스 경기장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가고파라...)

프랑스보다 더 침울한 독일 관중과 프랑스보다 더 흥분 잘하는 스페인 관중이 뒤섞여

응원의 목소리는 당연히(?) vamos rafa였다.

참으로 국민성이란 못 속인다 싶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달의 코치석은 너무 빼곡히 차 있는데

즈베레프의 코치석은 아주 성겼다. 

나달이야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클레이 코트 복귀이고

하필이면 세계 4위와 맞붙는 것이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사의 각오라는 것이 코치석에서 은연중에 흘러나온다.

반면 즈베레프네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코로나 상황처럼 한 좌석 띄고 한 좌석씩 자리를 차지한 코치석에서는

'무슨 1라운드에 빼곡히 나와서 앉아 있을 일이냐?'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상대가 아무리 나달이라 할지라도 그는 나이도 있고 2년간의 부상에서 회복된 선수.

반면 우리 즈베레프는 요새 상승세까지 타는 랭킹 4위의 선수다, 뭐 이런.


경기는 각 세트마다 접전이었고 묘하게 분위기가 나달에게 가다가도

결정적으로 경기는 즈베레프가 가지고 가는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즈베레프의 경기 운영을 보면서 나도 이제 그가

부상을 겪고 산전수전 경력이 붙으면서 '노련'해졌구나 싶었다.

예전에는 생긴 게 아깝게 플레이가 안 따라주는구나. 혼자 원통해했는데

이제는 한풀 꺾인 외모와 한 단계 성장한 실력이 잘 조화를 이룬 느낌.

12:45분, 3세트에 나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으나

결국 경기는 3:0으로 즈베레프의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경기가 한 편의 스포츠 드라마를 본 느낌이었다.

둘 다 부상을 겪었다. 선수에게 부상은 필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극복 과정에서 스토리가 생겨난다.

옛날의 몸상태를 그리워하며 그들이 GYM에서 흘렸을 땀방울이

경기에서 흘린 땀방울로 보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랜드 슬램 우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즈베레프에게

이번 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다.

37살의 나달은 어쩌면 은퇴를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마의 땀밴드 너머 성긴 머리숱이 육체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흙신의 명예를 걸고 2년을 재활해왔기에

그에게도 이 경기는 퇴로 없는 한 판이었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리고 1라운드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진 경기였지만

경기는 승부가 나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인생을 살지만

배수의 진을 치고 임했던 것에서도 고배를 마신다.

쓰디써서 삼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은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다른 경기를 계속 펼칠 수 있다.

그게 인생의 좋은 점이기도 하다.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경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그나저나 어제도 캐스퍼 루드의 경기를 봤는데

여지없이 이해할 수 없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주황색을 사랑하나 봐 루드는.

루드를 볼 수록 루네를 보고 싶은 것이, 나만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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