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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un 01. 2024

은발의 레이서

봉양일기 4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세상에서 운전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으면 

액셀을 밟는지 브레이크를 밟는지 분간이 정도로 부드러웠다.

시야를 넓게 하고

주변을 면밀히 살피며

차선을 물 흐르듯이 이동한다.

차량의 흐름에 방해되는 적이 없었고

교통법규를 준수하면서도 답답한 운전은 하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그저 그 차 안에서 노느라 별반 신경 쓰지도 않던 것이

내가 막상 운전대를 잡으면서는

기가 찰 정도로 운전을 잘하셨구나

싶은 생각이 수시로 든다.


아버지에게 운전면허 교육을 받을 때에는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운전의 신과 무면허 교육생의 동승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지 않나?

갖은 쿠사리와 잔소리와 야단을 맞으면서

그렇게 힘든 교습 시간을 보내고 나는 면허를 손에 넣었다.

차선을 맞출 때에는 와이퍼의 저 부분을 보면 된다.

주차를 할 때에는 어깨가 저 주차선에 닿았을 때에 핸들을 돌리면 된다.

왜 가르쳐 줬는 데에도 한 번에 주차를 못 하냐?

몇 번을 말했는데 왜 그렇게 하는 거냐.

그게 그렇게 안 되냐.

배움을 받는 나도 기운 빠졌지만

아마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어지간히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면허는 원래 그런 거잖아요.


어찌어찌 면허는 손에 넣었지만

초보인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보조석에 앉은 아버지는 운전자보다 더 바빴다.

아무리 내가 경력을 많이 쌓는다 해도 아버지의 경력을 넘을 수는 없는 일,

우리 부녀 지간의 운전 역사는 항상 내가 수련생인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달라졌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급정거를 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음이 더 급해진 것 같았다.

조급증이라고 할까? 사실 급할 일 하나 없는데

어째 운전에 여유라고는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운전을 하겠다,

아버지가 하는 운전은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

고 나선다.

은발의 레이서로 변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제 항상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불안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아직도 운전에 두려움이 없으시다.

그리고 나보다 좁은 골목길도, 그 골목길의 주차도, 45도가 넘는 오르막길도 

나보다 뛰어난 부분이 아직도 존재한다.(거 참)

그런 구간이 나오면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운전대를 넘긴다.

나 혼자라면 차를 몰고 오지도 않았을 곳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도로교통 상황에서는

아버지의 조급증 때문에 (아버지는 어떠실지 몰라도) 내가 운전하는 것이  맘 편하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는데 놓쳤다.

이런저런 일로 한 시간 가까이 콜백을 못하다가 전화를 드렸다.

사고가 났어.

네? 괜찮으세요?

어 뭐 살짝 닿은 정도인데 보험 처리했다.

안 다치셨으면 됐어요. 보험 처리도 잘하셨어요.

전화를 끊고 은발의 레이서에게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급하지도 않은데 또 급하셨던 모양이다.

다행히 차도 긁힌 부분이 없고

아버지도 상대도 별문제 없으니 그냥 된 거다.


미국에서는 90세가 넘어도 운전하고 다닌다는데(거기야 시스템이 그러니까.)

아버지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좀 여유를 가지고 운전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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