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계현 Sep 17. 2023

불안정한 세계로 들어가다

안전 제일주의 인간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9to6 직장인으로 기관에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 아침 좀비가 되어 지하철을 타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면서 오전을 보냈죠. 밀린 업무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더군요.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다들 그렇게 사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힘들어도 버텼어요. 때로 못 견디겠다 싶으면 이직을 했죠. 출근 장소가 바뀌는 것일 뿐 어차피 '직장인'.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뚜둥. 2023년 9월, 일상이 달라졌습니다. 직장을 나왔거든요. 제 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쓰고 보니 하루아침에 뚝딱 벌어진 일 같네요. 그럴 리가요. 전 '안전 제일주의 인간'입니다.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탈 때도 기둥이 잘 연결되었는지, 튼튼하게 만들어졌는지 꼼꼼히 살피는 게 버릇이에요. 여섯 살 꼬마도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는 '출렁다리'도 양 옆 안전바를 잡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쫄보죠.


안전하다는 느낌. 제게는 그게 참 중요합니다. 보호받고 지지받는 안정감이 있어야 편안함을 느끼죠. 그래서 직장이 좋았어요. 사이코 상사한테 비인간적인 대접도 받아봤지만, 그래도 회사는 체계와 규율이 있으니까요. 일을 개떡같이 해도 월급이 따박따박 통장에 박히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 제가 안정적이지도 않고 소속도 불명확한 세계에 뛰어들었어요. 'oo회사', 'oo기관'처럼 이미 정해진 틀에 들어가서 적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적응할 틀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세계죠.


자영업자라고도 하고 대표님이라고도 하더군요.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좋습니다. 나는 나를 대표하니까요. 하하하. 대표는 뭐, 결재 서류에 서명을 멋있게 갈기면 되는, 그런 거니까요.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 1인 센터 대표는 결제를 직접 하는데, 결재판에 서명할 펜까지 직접 사 와야 하는 자리지요. 기획, 영업, 회계, 홍보, 판매, 청소 등 다 해야 해요. 책장 조립도 하고, 종량제 봉투를 잘못 사서 바꿔오는 일도 하고, 창문에 붙은 사마귀를 내쫓는 일도 하죠. 




대표는 처음이라


사업도, 홍보도, 운영도, 죄다 처음이라서 막막하더군요.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봤어요.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블로그도 만들고, 인스타도 개설했어요. 적어도 하루에 한 꼭지는 올리라더군요. 상위 노출이 되어야 한다고. 홍보 글을 쓰려니 힘들더라고요. '홍보는 이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야.'라고 마음먹었으나 글이 잘 안써졌어요. 모든 글에 비용을 제시하면 너무 상업적인가, 그런데 정말 필요한 건 결제정보 아닌가, 글이 길어지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적당한 사진이 어디 없나, 이런저런 고민만 들고 확신이 없었죠.


다른 분들이 하는 대로 기관과 협약도 체결했어요. 카드사에 가맹점 등록도 하고, 제로페이도 신청하고, 현금영수증 신청도 하고, 짬짬이 외부 강의도 하고요. 그러면서 틀을 만드는 작업도 계속했죠. '우리 센터는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고, 오면 어떤 혜택이 있을 것이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계속 반복했죠. 꿈에서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저를 봤습니다(소름끼쳤음).


겨우 보름 됐는데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멍하다. 딱 그 단어가 적합한 듯해요. 멍하게 돌아가는 일상. 바쁘고 정신없는데 뭔가 계속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더 해야 할 것 같고 멈추면 안 될 것 같고 내가 놓치는 게 있을 것 같고. 기관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정해진 틀에 나를 적응시키려고 바둥거렸다면, 지금은 내가 적응할 틀을 새롭게 만들어내느라 휘청거리네요. 틀을 만드는 일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어요.



애벌레에게는 배울 게 참 많아요.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어요. 노스애르사애. 애벌레에 관한 그림책은 '꽃들에게 희망을'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이 애벌레도 강력하네요. 그냥 머리 식히자고 집어든 책인데, 뒤통수를 때리잖아요. 




애벌레는 잎을 먹어요. 나비가 되어야 하니까요. 한 작은 애벌레는 잎을 먹지 않아요. 맛이 없대요. 친구들이 "넌 왜 잎을 먹지 않니? 잎을 먹어야 나비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자, 작은 애벌레는 답해요.


"애벌레는 꼭 나비가 되어야 해?" 

"당연하지. 멋진 나비가 되는 게 우리 모두의 꿈인걸"

"우리 모두의 꿈이라고? 어떻게 모두 꿈이 같을 수 있지?"


작은 애벌레는 잎을 먹지 않고, 빨간 꽃, 보라 꽃, 파란색 도라지꽃, 연분홍 진달래 등 원하는 걸 먹었죠. 애벌레는 나비가 되지 못했어요. 알록달록 애벌레가 되어 풀숲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죠. 

나비가 된 친구들이 물어요. "나비가 못 돼도 괜찮니?" 

작은 애벌레는 말하죠. "응, 괜찮아. 난 내 모습 이대로를 사랑해."

아, 뻔한 이 문구가 왜 이렇게 찡할까요. '내 모습 이대로를 사랑해'라니.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알록달록 애벌레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봤어요. '노스애르사애(알록달록 애벌레의 이름)'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았죠. 


'친구들이 다들 잎을 먹고 나비가 되기를 꿈꾸는데, 넌 나비가 되지 못할까 봐 불안하지 않았니?

어쩜, 무리 중에서 가장 늦게, 약한 모습으로 태어났는데도, 

다른 애벌레에게 의존하지 않고 너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거니? 

어떻게 너의 경험을 믿고 그렇게 당당해질 수 있는 거니? 

(대체 너의 어머니가 누구시니?)'


노스애르사애는 자신이 좋아하는 보라색 꽃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네가 진짜 원했던 건 뭐였어?"




안전 제일주의 인간이었던 내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불안정한 세계로 뛰어든 이유. 센터를 차린 이유. 우선 첫 번째는 '딸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죠. 딸이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거든요. 딸아이의 7살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어요. 12시 반에 같이 하교하면서 탕후루도 사 먹고, '문구야 놀자'에 가서 다꾸 스티커도 왕창 사고요. 아이들이 부모랑 손잡고 등학교하는 건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언젠가 '엄마, 나 친구들이랑 놀다가 늦게 들어갈 거야' 할 날이 다가올 테니까요.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 이유가 있기는 한데, 첫 번째 이유만 생각했는데도 '멍한 상태'가 사라졌어요. 애벌레가 뒤통수를 쳐줘서 그렇겠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아이와 남편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거였거든요.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남는 시간에 일을 하는 것. 현재 제 삶의 우선순위가 그래요.


그러니,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죠. 유명해지지 않아도 괜찮고요. 센터에 문의가 빗발치지 않아도, 인스타에 '좋아요'가 몇백개 달리지 않아도 불안하지가 않아요. 불안정한 세계에 와 있는데도요. 불안정한 세계에도 두 발을 딛고 서있으면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으니. 남들이 하라는대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단단히 서야죠.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선택했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 거고.

그러니 불안해도 '있는 그대로' 내가 괜찮은 거, 그런 거겠죠?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 너의 경험, 너의 가치를 믿어.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