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계현 Dec 01. 2023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건 힘들다

- 최악의 강의를 한 날, 실패에서 뽑아먹기 



얼마 전에 모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전에 따뜻한 원두커피도 건네받았지요.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강의 시간이 되어 참여자들이 하나둘씩 모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말이 술술 나오더군요. 말 잘하는 저의 모습은 참 어색합니다. 지금의 저를 아는 누군가는 '선생님, 말씀 잘하세요.'라고 할지 모르지만, 전 제 인생을 겪어봐서 알거든요. 발표 전에는 늘 심장이 터져나갈 듯 뛰죠. 물도 마시고 심호흡도 해요. 주책없이 뛰는 심장에게 '제발 나대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저를 알아요. 그런데 그날따라 희한하게 말이 잘 나오더란 말입니다.


참여자들이 유독 적극적이었어요. 호흡이 좋았습니다. '헤이~호~오~'하면 '호~오~'하고 응수를 해주셨죠. 화답을 받으면 신이 나요.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도, 제 강의 내용에 제가 빠져들어요. 미처 생각치못한 통찰이 나오기도 하죠. 참여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더 집중해서 피드백을 드리게 되고요. 며칠 후에 강의를 주관해 준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날 강의에 참여했던 분들이 강사에 대한 칭찬을 엄청 쏟아내셨다고. 뭐, 저도 알아요. 그날의 강의 분위기는 저도 대만족이었으니까요.





그다음 주 다른 학교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올 겨울 들어 제일 춥다는 날이었어요. 추운 날은 게으름을 피워줘야 하는데, 이런 날 외출을 하려니 힘들더군요. 나름 요령을 부린다고 '남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자'라고 마음먹고 버스를 탔죠. 자동차로 가면 1시간인데, 버스로 돌아가니 2시간. 지치고 추웠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버스 안에서 여유 있게 책도 보고.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참여자들이 먼저 앉아계셨어요. 강의를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아 있는데, 꽤 일찍 와계시더라고요. 서로 무리를 지어서 떠들고 계셨어요. 그 사이로 들어가는데 아무도 제게 인사를 건네지 않더군요. 추운 날씨 때문에 두꺼운 니트와 부츠를 신어서 강사인 줄 모르셨을까요.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강의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데, 물 한 모금 준비되어 있지 않은 걸보고 기분이 상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2시간을 왔다고요. 거기 계신 누군가에게 물 한 모금 줄 수 있는지 여쭤볼까. 목마른 자가 물을 찾아야지. 근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 전화하는 사람, 관리자들은 번갈아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부산스럽고 산만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목마르다는 걸 잊었죠. 그리고 시간이 되어 애써 웃으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심장이 부글부글했는지 말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버벅대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억지로 하고 있더군요. 영하 10도 날씨에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산골짜기 같은 장소에 와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떠들어대려니 뇌가 짜증이 났나 봅니다. 강사의 짜증은 듣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아챕니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그게 어디 감춰지나요. 


급기야 자기들끼리 떠드는 사태까지 이르더군요. 예민한 감각이 발동했어요. '아흐~, 나도 말하기 싫다.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은데' 단전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죠. 잠깐 말을 멈추었더니, 몇몇 눈치 빠른 분들은 수다를 멈추고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그렇게 강의는 이어졌지만, 말맛이 뚝 떨어졌어요. 밥맛도 없는데 살라고 꾸역꾸역 먹는 밥처럼, 재미도 없는데 살라고 일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의욕이 사라지더라고요. 


참여자들은 그런 생각을 하겠죠. '강사가 영 형편없구먼.' 강의만족도에도 쓸 겁니다. <강의 구성이 별로고, 강사가 성의가 없으며, 전달방식이 부적절함> 총체적 난국이었던 오늘 상황을 몇 줄의 만족도 후기로 평가받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별로였어요. 동네 커피숍에서 불친절을 경험하면 굳이 영수증을 챙겨 와서, 네이버영수증 리뷰에 비판적인 글을 써댔던 과거의 저를 반성했습니다. 커피숍 사장님께도 그날의 상황이란 게 있을 텐데, 제 입장에서만 '소비자는 왕이다' 논리를 펼쳤던 우매한 제가 떠오르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계속 생각했어요. '오늘의 실패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콘 애덤스는 '시스템'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실패를 끌어들이고, 실패에서 최대한 뽑아먹어라' 뽑아먹을 게 뭐 있나 계속 되짚었습니다. 사실 전 강의 전부터 기분이 뒤틀려있었어요. 날씨가 추워서? 추운 날에는 게으름을 피워야 한다며 차를 운전하지 않아서? 2시간 동안 추위를 견디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피곤해져서? 커피 수혈을 받지 못해서? 참여자들의 성향이 들떠있는 탓에? 정장을 입지 않고 니트와 부츠차림으로 강의를 해서? 강의 내용이 별로라서?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강사로서 일할 때는 강의를 잘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선, 옷차림은 강사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예의를 갖춘 옷이 좋아요. 정장까지는 아니어도 단정하고 갖춰 입은 듯한 옷이어야 해요. 날씨가 추워서 털부츠를 신어야 한다면, 강의를 위해 갈아 신을 신발 정도는 준비해 가야죠. 강사처럼 입어야 모르는 사람들도 강사임을 알아보고 챙겨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날 입은 저의 복장은 지난주 일요일에 홈플러스에 갈때 입었던 착장과 같았어요. 오로지 따뜻함에 충실했던.)


둘째, 다음번 강의에는 텀블러에 예가체프 커피를 담아서 갈 거예요. 강사가 마실 물이나 음료를 준비해 주는 곳도 있지만 그걸 단정해서는 안되요. 주최측에 바랄 필요 없이, 제가 챙겨가면 되니까요. 제 핏줄에 커피가 흐른다는 걸 아는 사람이 챙겨야죠.


셋째, 귀찮더라도 자차로 이동해서 피로감을 덜어야겠어요. 남이 운전해 주는 차가 편하긴 하지만, 이동거리가 길면 궁둥이도 아프고 춥더라고요. 강의에 집중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동거리를 줄이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간혹, 참여자들이 호응을 하든 안 하든 개의치 않는 분들을 봐요. 본인이 하고 싶은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데만 애쓰죠. 전 그런 편이 못되요. 상대의 반응을 살펴요. 오랜 습관이죠. 잘 듣다가도 눈썹을 찡긋하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 바로 알아요. '혹시 지금 이 부분,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하고 묻죠. 진짜 알아드는 사람의 끄덕임과 예의상 하는 끄덕임의 차이도 알아요. 누군가를 지목해서 질문을 던졌을 때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말해볼게요'하는 뉘앙스와 '대체 날 왜 지목했어요..' 하는 원망 어린 뉘앙스도 구분할 줄 알죠.


상대의 반응을 예민하게 느낀다는 건, 상담전문가로서는 참으로 축복할만한 재능이지만 강사로서는 악마가 내린 저주같아요. 내 이야기가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실시간으로 입력되거든요. 물론 만족시키고 싶죠.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고,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게끔 하고 싶죠. 강의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고요. 원하니까 애쓰지만, 누군가를 만족시킨다는 건 참 힘들어요. 그러면 내려놓고 덜 신경써야하는데, 그게 어디되나요, 이미 나라는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는데.


강사는 청중의 만족을 먹고 살아요. 참여자가 만족할 수 있는 강의여야 하는 거죠. 그게 강사의 역량이고요. 그래서 강의를 하는 한, 참여자의 반응을 살피고 응수하고 신경쓰는 일은 계속 해야할거예요. 피곤할지라도요. 이번 강의를 망쳐서 참 다행이예요. 덕분에 지금껏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을 챙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강의를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야죠. 강사로서의 예의 있는 옷차림을 하고, 텀블러에 예가체프 커피를 담아서 기분을 끌어올리고, 몸 상태를 피곤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 스콧 애덤스('더 시스템'이라는 책의 저자이자 '딜버트'를 그린 만화가) 말이 맞았어요. 망치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네요. 

작가의 이전글 반성은 일상, 자책은 필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