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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현 Dec 19. 2023

한심한 고양이와 포악한 고양이, 무엇이 더 나쁠까



무엇이 더 최악일까

눈앞에 작고 통통한 아기 고양이가 있다. 몸을 웅크린 아기 고양이 옆으로 쥐가 지나간다. 고양이보다 훨씬 작고 통통한 쥐. 아기 고양이는 쥐를 멀뚱히 보면서 앞발을 살짝 들어본다. 놀자는 건가. 고양이는 왜 쥐를 잡지 않을까. 쥐는 더러운 병균을 옮긴다는데, 저거 고양이 맞아? 한심하다, 한심해.


다음 장면. 고양이가 살쾡이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쥐의 몸통을 한 입에 물었다. 뾰족한 이빨과 낭자한 피, 잔인한 광경에 몸이 굳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똘망하고 작고 통통한 아기 고양이는 없고, 살아 숨 쉬는 무언가를 물어뜯는 맹수만 남았다. 끔찍하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쥐를 잡지 않는 고양이를 보며 한심했고, 쥐를 물어뜯는 고양이를 보고 끔찍했다. 과연 어떤 게 더 최악일까. 더러운 쥐와 놀고 싶은 고양이인가, 뾰족한 이빨로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인가. 한심하고 답답하지만 평화로운 고양이인가, 제 일을 했지만 잔인한 고양이인가.



가증스럽기도 하지

꿈이었다. 프로이트 할아버지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데, 내 꿈은 무얼 말하는 걸까.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내게 뭔가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언지 계속 곱씹기만 한다.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냥 부끄러웠다. 혼란스러움과 부끄러움, 그 느낌은 분명했다. 순딩 순딩한 고양이에 대한 '한심함'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나라는 사람의 '가증스러움'이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고양이 곁을 유유히 지나가는 쥐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랬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야 해.' 선입견이라고 할까, 고정관념이라고 할까. 나만의 확실한 정답을 정해놓으니 고양이가 한심해 보였다. 바보 같고 무책임해 보였다. '넌 대체 뭐 하고 사니, 니 할 일을 해야지. 쥐는 더러운 병균을 옮긴다고! 그거 잡는 게 니 일이잖아!' 


고양이가 살쾡이로 돌변하자 이번에는 끔찍했다. '저건 더 이상 귀여운 고양이가 아니야. 뾰족한 이빨로 쥐의 살점을 물어뜯잖아. 보기 싫어, 저리 가!' 고양이는 제 일을 했을 뿐인데, 답답하고 한심하다고 마음속으로 고양이를 몰아붙인 건 나인데, 심장이 쫄깃해지는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저 장면을 본 이상, 고양이가 내 앞에서 배를 보이며 누운들, 아무렇지 않게 그 배를 간지럽힐 수 있을까. 한심해 보이지도 않지만, 더 이상 귀엽지도 않다.




나는 한심한 고양이인가, 포악한 고양이인가

나는 고양이와 쥐를 바라보는 제삼자이자, 그 시선에 포박당하는 고양이다. 한심하다고 타박하고는, 그렇지 않은 행동을 보이면 못됐다고 구박한다. 


여럿이 모여 선물을 나누어가질 때, 나는 제일 나중에 가져가는 사람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먼저 가져가는 게 익숙지 않다. '나보다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하는 오지랖과 배려는 행동을 굼뜨게 한다. 나와 같은 것을 집으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주춤거리는, 그런 류의 사회성이 내게는 익숙하다. 착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답답해지는. '네가 원하는 걸 왜 먼저 요구하지 않냐고!' 스스로 타박하고 한심해한다. 


누군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까 봐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나에 대한 폭력'이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무시한 결과는 끔찍하니까.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합리화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없는 거다. 내가 원한다고, 내 거라고 당당히 요구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스스로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이상한 건, 스스로 나를 깎아내리는 건 감당이 되면서도, 누가 나를 무시하면 지나치게 발끈한다는 거다.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온 친구와 치킨을 시켜 먹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가 닭다리를 집어간다. "너 닭다리 안 좋아하지? 지난번에도 안 먹던데?" 그럴 때 화가 난다. '네가 언제 나한테 물어는 봤니? 나 원래 좋아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안 먹고 둔 건데... 너도 한 번은 나를 배려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눈으로 말하면서 속만 끓이는 거지. 그러니 포악성이 자란다. 상대에게 표출되지 않은 화는 속에서 용암처럼 때를 기다리고. 그러다가 친구가 9시, 10시가 돼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면, 갑자기 짜증이 확 나서 이렇게 말한다. "너 집에 갈 때 안 됐니?" 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일어난다. 


좋게 말할 수 있는 건데, 확 짜증이 솟구쳐서 물어버렸다. '난 왜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냐. 왜 이렇게 예민하냐.' 자책하고 화를 낸다. 갑자기 민망해졌을 친구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머리가 아프다. 이런 변덕과 예민함이 짜증 나게 싫다. 원하는 걸 말 못 하지만 표면적인 갈등이 없는 나와 직설적으로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갈등을 유발하는 나, 과연 무엇이 더 최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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