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은 특별해
벌써 12월 하고도 18일이다. 2020년이 코로나 뉴스와 검찰총장 vs 법무부 장관의 대결을 지겹게 마주하며 지나간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12월이면 나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 다가온다. 나의 아버지, 흠... 아버지보다는 아빠가 적절한 것 같다. 아빠의 기일을 준비해야 한다. 12월 29일. 2013년부터 매년 다가오는 아빠의 기일은 슬픔과 그리움이 뒤섞여 맞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만의 방법으로 그 날을 맞이하고 싶다. 아빠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방법은 별거 없다. 지금처럼, 이렇게 아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방법이 전부다. 내가 이렇게 나 다운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정혜윤 작가의 영향이 컸다. 최근에 읽은 <아무튼, 메모>를 읽고 난 후.
이렇게 옮겨 적는 행동이 내 나름대로 꼽추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아무튼 메모, 139쪽)
이 글귀를 만나는 순간, 이거다!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글을 쓰며 애도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진솔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겨졌다. 정혜윤 작가는 서울대공원을 오고 가며 날지 못하는 새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남들에게 보잘것없는 새일 테지만 작가와 친구는 그 새를 보러 대공원을 가고는 했다. 그러다 현실에 치여 살며 그 새를 잊고 살다 어느 날 번뜩 떠올라 대공원을 가보게 되지만 그들에게 꼽추라 불리던 새는 죽고 없었다. 그다음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는 한낱 새 한 마리에 불과한 꼽추에게 정혜윤 작가만의 방식으로 애도를 한다. 새와 관련된 내용을 조사해서 메모를 하면서 꼽추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랜다.
오호라. 이 방법이 있었군. 어린 시절 가끔 글짓기로 상을 타 오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빠라면 글쓰기로 그리워하고 있음을 전달하는 내 모습을 아주 기뻐하시겠구나. 물론 내 꿈에 나타나 아빠가 그러거라,라고 말씀하셨다면 더 극적이었을 테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아빠는 쉰여덟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입장하셨다. 할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시자 아빠는 대장 내시경을 매년 해왔다. 자신의 몸에 자라날지 모르는 암세포를 철저히 철통 방어 해오셨다. 그런데 나의 아빠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병명을 얻고, 진단받은 지 두 달 만에 말이다. 비호지킨 림프종, 간호학과를 나온 나에게 조차 낯선 병명이다. 학과 수업을 받을 때 면밀히 공부하지 않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병명 중에 하나였는데, 그 병명이 우리 아빠를 앗아갔다. 이런 젠장. 아빠 덕분에 정확히 알게 되었다.
아빠는 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진단받은 다음날부터 언제부터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냐며 의료진들을 달달 볶았다. 암세포가 더 퍼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항암을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호통을 쳤다. 결국 겨우 겨우 병실을 구해 그렇게 바라던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빠는 항암 치료 몇 차례만에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잃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떠나게 되었다.
진단부터, 치료, 죽음까지 두 달 하고 15일이 걸렸다. 남들은 몇십 년의 과정이 걸리는 코스를 우리 가족은 단기 코스로 밟았다. 급작스런 이별로 흘린 눈물은 바다를 이룰 만큼 차고 넘쳤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아빠의 사진을 보다 눈물 쏟아내고, 혼자 지내게 된 엄마를 생각하니 또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아내고, 그러다 나는 아이와 함께 엄마 곁에서 지내게 되었다. 슬픔에 의욕을 잃었던 엄마는 두 살 된 손주를 보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아이 덕분에 많이 웃었고, 아이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빠 빈자리로 느껴지는 허전함의 무게로 가슴을 짓눌려오던 것들이 서서히 덜어지는 것이 보였다. 엄마의 웃음이 감사했다.
사회초년생 무렵의 일로 아빠를 추억하고 싶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의 병원 면접을 떨어지고, 계약직으로 대형병원 응급실에 근무하게 되었다. 응급실이라는 곳은 드라마에서만 멋진 곳. 내 삶이 되면 죽음을 생각할 만큼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일주일 째인 나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내려졌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환자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라는 임무. 젠장 근무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 참을 수 없다,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나는 온순한 양처럼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총총 걸어갔다. 혈관이 좋으니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나 환자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나, 긴장 탓에 땀이 솟았다. 환자는 내가 어떻게 할는지,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이라고 절망적으로 생각을 하던 찰나, 누군가 "민희야!"라고 불렀다. 어맛!@.@ 세상에! 아빠가 침대 너머에 와 계신 것이 아닌가. 하필 이럴 때 나타나고 난리야, 라며 짜증이 솟구쳤다. 딸내미 속도 모르고 "아빠가 떡볶이랑 순대 사 왔어. 좀 있다 먹어"라고 하는 것 아닌가. 고마움은 단 1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내뱉은 말은 "빨리 가!" 세상에, 글을 쓰면서도 내가 참 못된 것 같다. 꼬랑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신나게 뛰어 오던 강아지가 맥 빠져 돌아서듯 아빠는 뻘쭘해하며 되돌아갔다.
이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있다. 미안했다고, 내가 쪽팔려서 그랬던 거라고. 어떻게 떡볶이와 순대를 사 올 생각을 했느냐고, 이런 아빠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이 글이 하늘에 닿았으면 좋겠다. 정말 고마웠다는 이 마음까지.
아빠의 죽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한하다는 것을 되짚어보니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분일초의 소중함을 알아버렸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퇴직 후 텃밭 농장 주인을 꿈꾸던 아빠 대신 엄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나는 엄마 곁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엄마에게 웃음을 안기며 위로가 되어준 두 살 된 아들은 벌써 아홉 살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은 내 마음에 잘 간직되어 있다. 거기선 아프지 말고 건강한 모습으로 텃밭을 일구고 계시길 바란다는 마음을 두 눈에 한 가득 담아 하늘을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