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를 다시 즐기고 있습니다. 일을 그만두면서 오전에 여유가 생겼고, 그 시간을 활용해서 1시간~2시간 정도 치고 옵니다. 제가 테니스를 배우고 즐긴 기간은 10년이 넘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배웠거든요. 그렇다고 선수처럼 치는 것은 아닙니다. 테니스를 즐긴 기간은 10년이 넘지만, 그 기간 내내 테니스를 잘 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균적으로 1년에 3~6개월 정도 레슨을 받고 학업이다, 개인 사정이다 뭐다 하면서 테니스를 손에서 놓곤 했습니다. 제대로 꾸준히 오랫동안 배운 것이 아닌 배웠다 말았다를 반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테니스를 접한 기간에 비해 실력은 좀 많이 아쉬운 편입니다.
테니스 코치, 잘 치는 동호인, 이제 막 시작한 동호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제가 배우기도 하고 반대로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주로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포핸드 스트로크, 백핸드 스트로크, 발리, 스매시, 서브 등 테니스를 즐기기 위한 기본 동작을 배우고 동선이라든지, 발 놀림이라든지 등의 기술들도 배웠는데요.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테니스를 배우는 것 외로 사람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치고 어떻게 말하고, 다른 누구는 또 어떻게 가르치는지 수많은 사례를 접하다 보니 '나는 어떻게 해야겠구나.'하고 선택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할까요. 이러한 일을 접하면서 또는 보면서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지문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 같은 지문은 없다고요. 사람이 70억 명이면 70억 개의 지문이 있다고요. 여기서 좀 나아가서, 사람이 70억 명 있다면 70억 개의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외형적으로는 같을 수 있어도 성격은 다른 것처럼 내면적으로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현상을 보고 똑같은 추론 과정을 거쳐 똑같은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슷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현장에서 똑같은 지식을 전달하는 경우입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입니다. 먼저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답이 정해져있는 수학 문제의 풀이 방법과 답을 가르친다 했을 때, 선생님에 따라 교육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A라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먼저 생각해보게 한 다음 문제풀이를 하고 B라는 선생님은 처음부터 학생들과 같이 풉니다. C라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문제를 풉니다. 목적과 결과는 같습니다.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고 결과는 학생들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A, B, C 3명의 선생님이 있고 3가지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을 잘못 가르쳤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구도 잘못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오답을 가르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어떨까요? 가르치는 사람과는 다르게 모두가 같은 기준을 가지고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나요? 안타깝게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보다 더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에 대해서는 '삶의 경험'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잡고자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앞뒤 부가 설명 없이 '사람은 솔직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이유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솔직하지 않아서 부정적인 감정을 받았던 경험, 타인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 등이 포함된 '나의 경험'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설사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야기, 사례를 생각하면서 수많은 방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법, 이해하는 포인트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해한다면 혁신적인 교육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겠지요.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잖아요.
가르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막막하기도 하고 반대로 재미있기도 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내가 이해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상대방이 100% 이해한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 방법을 철석같이 믿고 내가 이 방법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이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육자라면 응당 더 그래야 할 것입니다. 상대는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 방법이 옳다고 계속 몰아붙이는 행동만큼 비극적이고 비효율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해시키려는 사람과 이해해야 하는 사람의 갈등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잠깐 시간을 두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저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한 후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이해하는데 이 사람은 왜 이해를 못 하지?'하고 생각한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보편적인 사례(일상, 진리, 생활 관련해서)를 들어 설명하곤 합니다. 그렇게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고요.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나부터 나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여유 있고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거 아니면 안 돼! 몰라!' 하는 생각을 그 방법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최고의 이해 방법이라 하더라도 최대한 버리고 다른 방법으로 배워보자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바뀔 때까지 노력 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변하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조금이든 많이든 어느새 바뀐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