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에게 아가, 아기, 애기라고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실제로도 안 쓴다.
애들이 자기자신을 '아기'라고 인식하는 게 싫다. 말이란 게 무섭다. 자꾸 들으면 자기가 진짜 그건 줄 안다. 일곱 살과 아홉 살, 애기 아닌데.
내가 자꾸 피력해서 그런지 애들도 어른이 힘든 줄을 안다. 지금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해가 안된다. 애인게 왜 좋지? 나는 어릴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아이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요즘은 안 그런가보다. 내 새끼들을 보면 딱히 할 수 없는 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른들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놀아도 준다. 싫은 건 안 먹어도 되고 삼시세끼 다른 반찬에 키즈카페도 수두룩하고 유튜브로 보고 싶은 거 하루종일 볼 수 있다. 하긴 이건 나라도 좋겠다 싶다.
그뿐인가. 뭐하나 하면 다들 칭찬해준다. 나도 그런다. 솔직히 옆돌기 다리 펴지도 못하고 폴짝 뛰는거 다 보이는데 진짜 잘한다고 칭찬해준다. 뭐, 칭찬해줘서 한 번이라도 더 시도하고 더 잘하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좋으니까. 비슷하게 절대 못할 것 같은 것도 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정말 말이란게 무섭다. 우쭈쭈하면 진짜 자기가 잘난 줄 안다.
그래, 라떼와는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 나야 직파법으로 맨땅에 씨뿌려서 자란 거 거둬들이듯 대충 컸지만 모내기 농법이 개발된 것처럼 요즘은 다른 식으로 키운다는 걸 안다. 나도 눈치가 남들만큼은 있으니 어느정도까지는 맞춰줄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싫은 게 있다. 내 아이들이 물건이든 도움이든 받는 것, 자기가 약한 것, 자기가 미숙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맨날 '놀이' 만 하지 말고 '작업'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기가 '못하는 것'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마리아 몬테소리 선생도 교구와 작업을 함께 주지 않았던가.
애는 언제까지 애가 아니다. 결국 자라고 어른이 되겠지. 내새끼들도 이제는 '아가'가 아니라 '어린이'니, 어린이에 맞게 대우하고 싶다. 언젠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될 테니까. 언제까지고 '애기'로 자라다가 갑자기 '어른'을 대면하면, 그쪽이고 나도 양쪽다 어색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미리미리 말조심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신경 많이 쓴다. 적당히 친한 척하고 많이 바쁜척 한다. 그럼 좀 덜 앵기니까. 애들도 어른도 혼자만의 시간은 중요하다. 나 좀 혼자 있게 해주라 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클수록 불현듯 애기야, 아가 하고 부르고 싶어질 때가 간혹 찾아온다. 어쩔 수 없다. 내 배에서 난 새끼를 몇 년 동안 끼고 다니지 않았는가. 남들 눈엔 어떨지 몰라도 내 눈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 밖에 없다. 미울 때도 있긴 해도 행동이 미운 거지 애가 미운 건 아니니까.
결론만 말하면 쿨하려고 하는데 가끔 눈에 콩깍지가 안 벗겨질 때가 있다는 거다. 그것도 요즘 들어 상당히. 애가 크니까 아쉬워서 그런지 더해진다 싶은데.
하지만 내 교육관은 확고하니까. 또 교육 태도는 일관되어야 하니까. 참아본다. 그래도 못 참을 때가 생기긴 한다. 어쩔 수 없다. 나도 지 새끼가 이쁜 고슴도치 부모라.
그럴 땐 "예쁜아."하고 부른다. 아가보다 훨씬 낫다. 우리 말 좋은 말 고운 말이다. 애들도 좋아한다. 지가 예뻐서 예쁜이라고 부르는 줄 안다. 기가 막힌다. 마음속으로만 말한다. 그거 아니거든.
내 새끼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와 같이 살겠다고 한다. 내 의견은? 난 싫다. 친구같은 딸, 든든한 버팀목, 분리불안 엄마. 나와는 먼 얘기다. 독립해줬으면 좋겠다.
뭐. 막 만든 찌개를 나눠 담아줘도 식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산다면, 그정도는 좋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