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하다는 건 상대적이다. 내 새끼들은 멍청하다. 일곱 살의 나, 아홉 살의 나보다. 이걸 받아들이는게 어려웠다.
한번도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적이 없다. 오목이고 바둑이고 연년생의 오빠한테 항상 깨졌고 경시대회에서 상 한번 타본 적 없었다. 경시대회나 백일장은 학교 공인하에 합법적으로(?) 수업을 땡땡이 치고 점심값 받아서 노는 날이었다.
연합고사를 컷이나 넘기며 들어간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갔다. 비슷했다. 서울엔 정말 별 똑똑이가 다 있더라. 한때 유행하던 보드게임도 좋아는 했는데 승률은 별로였다. 시험이 요령인 것처럼 게임도 귀신같이 요령을 찾아내는 인간들이 있다. 천재다. 천재라는게 있긴 했다. 내가 아닐 뿐이지.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평범하다고. 그런데 몇 십 년을 컸어도 좀처럼 늘지 않던 자신감이 애 키우면서 생기고 있다. 내가 쟤보다는 더 똑똑했지 하면서. 나는 평범하게 똑똑했던 것이다. 티 안나고 조용조용하게.
라떼는 말이야, 하는 꼰대짓이었으면 차라리 낫겠다. 이사하기 전이니 1학년 쯤 됐겠다. <세종대왕> 책을 좋아해서 책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다. 이산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도는 알았다. 길 걸으면서 책 읽다가 전봇대 바로 전에서 멈추는게 재주였다. 책갈피가 없어도 괜찮았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전부 기억했으니까.
그런데 내 새끼들. 이게 안된다. <알프스의 하이디>를 읽었댄다. 클라라가 어떻게 걸었는지 물어봤더니 클라라가 걸어요? 하고 되묻는다. 골이 띵했다. 책을 펼쳐들었다. 하이디가 왜 알프스 집으로 돌아갔을까? 하니까 몇 번 집에 가고 싶어 하니까 라고 말한다. 맞기는 한데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니다. 하이디가 몽유병인건 30년쯤 전에 책 읽은 나도 기억난다. 야.......
화가 났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혼을 낸 게 아니라 화를 냈다. 진짜로 머릿속이 쨍했다. 책 읽었다며? 이걸 왜 몰라? 왜 기억을 못해? 아니 왜? 대체 왜?
이런 건 그전에도 여러 번 겪었다. 작년부터 나는 집에서 저녁 먹고 하루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애들 공부를 봐줬다. 할 때도 있고 안할 때도 있고 내가 바쁘거나 집에서 술 한잔 하거나 뭐 그럴 때도 슬쩍 건너 뛰었다. 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애 키우는 부모들이 흔히 자기 애 가르치는 거 진짜 힘든 일이라고 한다. 진짜 그렇다. 애가 2 더하기 7이 안돼서 손가락을 꼽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화내면 안된다. 화내면 지는 거다. 난 꽤 자주 진다.
돈내고 배우게 하면 좋은데 두 놈 학원 두 군데 보낸다고 가계부가 비명을 지른다. 필요하니까 한다. 비지니스적 관계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생각이 오 분을 못 가는게 문제다.
정말 비지니스적인 관계였으면 차라리 낫겠다. 남의 애들 가르칠 때는 손가락을 꼽든 발가락을 들든 아무 생각 안든다. 그냥 되게 귀엽다. 내 새끼 아니니까 기대며 책임이며 하나도 없고 정말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 잘하면 좋은 거고 못 해도 다음에 잘하면 되니까 괜찮다. 평화롭다. 남의 애들 다 내가 가르치는 거 놀아주는 거 좋아한다. 정말이다.
그런데 내 새끼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나도 내 새끼들 옆에 끼고 가르쳐보면서 이걸 알았다. 감각놀이네 뭐네 하는건 아예 노는 거라 대충 했었는데, 일단 결과와 수준이 보이는 과업이 주어지면 내 새끼의 수준이 투명하게 보인다. 내 새끼 음치네. 내 새끼 일곱살인데 열여섯에서 열여덟으로 바로 넘어가는구나. 내새끼 글씨가 괴발개발이구나. 뭐 그런 것들이. 정말 투명하게.
볼 때마다 느낀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는걸. 어르신들 중 음치가 많은 건 배울 기회가 적어서라는 것을, 숫자 세기며 단정한 글씨 하나도 뭐 하나 자기 혼자 느는 것이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닫는다. 선생님들께서 정말 열일하시는 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보고싶어요 선생님. 온라인 개학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죽을 것 같습니다. 두 달만 더하면 저 가출할지도 모르겠어요. 육아거부 하고 싶습니다. 진심. 정말. 레알요.
......
다시 돌아와서.
내가 나를 애들에게 투영하여 본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기대고 과업이고 따지기 이전에, 나는 했는데 얘네들은 못하니까 더 화가 나는 거다. 지금의 나, 어른인 내가 아니라 일곱 살 아홉 살의 나를 끄집어내 비교해봐도 얘들이 못해서.
이걸 왜 몰라? 대체 왜? 아니 왜? 공부하잖아?일곱 살이잖아? 아홉 살이잖아?난 다 했는데? 되던데? 됐는데?
......
화내고 나면 현타가 온다. 동굴에 틀어박혀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나면 그때야 내가 뭔짓을 했나 하고 자괴감과 후회가 밀려온다. 내 새끼들 이쁜데 엄마가 속이 밴댕이 속이라 참 고생이 많다.
생각을 바꿔본다. 못할 수도 있지. 그래 나보다 좀 애들이 멍청한가보다. 그렇게 인정해버리면 편하다. 이게 힘들지만. 솔직히 많이 힘들지만. 존심 상하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그런데.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화를 낸다고 멍청한 애들이 하루 아침에 똑식이들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화내면 애들은 공부 하기 싫어할 테고 그럼 더 바보가 될 거다. 그럼 손해잖는가. 명색이 상인인데 내 시간 쓰고 감정 쓰면서 내 애들도 바보가 되고 관계가 악화되는 일 같은 건 안한다. 아주 최악의 패다.
화내지 말고 열 번을 설명해서 안되면 스무 번 서른 번을 가르쳐서 알아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역시 사람은 마인드가 중요하다. 칠년 전을 반추한다. 백일난 애를(6킬로가 넘는다) 세 시간 동안 안아 역시 세 시간 동안 오만 동요 다 생각해내 자장가 불러주며 일 년쯤 지나면 이런 건 기억도 안날 거라며 멀리 본 적이 있다.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버텨보면 버텨진다. 감정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 문제를 습관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으니까.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라는데 하다보면 언젠가 똑식이까지는 아니라도 대화가 될 정도의 지성은 갖추게 되지 않겠는가.
하루 두 시간 쪽잠 자며 젖 물릴 때 항상 생각했던 문장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칼릴 지브란인지 시편인지는 모르겠다. 뭐든 역시 시대를 초월한 명문장은 가치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갈 거다. 오 년만 지나면 애들도 알아서 공부하겠지. 애 안고 삼손처럼 세 시간도 버틴 때도 있었는데(둘째는 여섯시간이었다.) 감정노동 한 시간 정도는 껌이다. 자신감을 가져본다.
하다보면 직접 가르치는 장점도 간혹 보인다. 내 새끼가 국어는 잘하는 걸 알 수 있다. 의외로 <중요>나 <어려운 문제>는 꽤 풀더라. 접해보지 못한 문제만 나오면 헤매서 그렇지. 성과도 있다. 글씨가 날아가던 놈이 밑줄 공책에 혼자 일기 여섯 줄 써서 가져오면 감격스럽다. 물론 시켜서 했지만. 띄어쓰기 하나도 안했지만. 맞춤법도 틀렸지만.
그냥 돈으로 바르는 게 제일 맘 편하긴 하다. 돈 많이 벌고 싶다. 애들은 그냥 대충 컸으면 좋겠다. 이런 마인드로 키우다 보면 내 새끼들 별 거 아닌 어른이 되더라도 행복지수 하나는 끝내주게 높을 것 같다. 지금도 나 되게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