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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초 Jun 03. 2022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기

나는 생계형 워킹맘입니다 19


육아와 직장일 그리고 간간히 집안일까지 3가지 업무를 쉴 틈 없이 저글링하다보니 문득 심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처음엔 애써 외면했다. '워킹맘의 삶이라는 게 다 이렇지',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을텐데 나약하게 살지 말자'라며 애써 내 안의 신호를 외면했다. 하지만 신호는 점점 더 뚜렷해졌고 급기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방금 뭘 했는지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가 멍한 상태가 지속됐다. 항상 머릿속에 안개가 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항상 심한 짜증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물론 아이가 옆에 있으면 혼신의 힘으로 미소를 띄었지만 아이가 잠들면 다시 구깃구깃해진 몸과 마음으로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때마침 직장에는 여러 가지 변동이 생겨 업무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데없이 보직까지 맡게 되어 자잘한 업무가 늘어났고 회의도 많아졌다. '막내 직원'일 때랑은 다른 느낌의 스트레스였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퇴근후나 주말에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휴식을 잠시라도 취할 수 있었지만 워킹맘에게 그것은 완전한 사치였다. 다들 이렇게 사나?

나는 전 직장에서 육아휴직 후 후폭풍으로 인한 교묘한 직장내 괴롭힘으로 반강제 퇴사한 후 현 회사로 쉴틈 없이 하루만에 환승을 했다.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쓸 수 있는 연차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끌어쓸 수 있는 연차는 아이 어린이집 방학과 혹시나 등원을 못 하게 될 사태 등에 대비해 남겨둬야 했다.


남편 역시 일과 육아와 가사를 힘겹게 병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평일 비번인 날에는 아이를 등원하고 나면 몇 시간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다소 '지나칠 정도로' 부지런한 남편은 그 와중에도 아이를 위한 식단을 짜고 반찬을 만들거나 집안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맙소사. 차라리 다른 집 남편들처럼 나몰라라 쉬고 있다면 나도 별 죄책감 없이(?) 하루쯤 애 맡겨두고 쉬기라도 할텐데 나보다 더 스스로를 혹사하는 사람을 두고 내가 힘들다고 쉬기에는 양심에 찔린다는 배부른 불만도 생겼다. 남편도 눈치껏 '이번 주말은 내가 아이 볼 테니 여보는 나가서 쉬고 와~'라고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남편도 노는 게 아닌데 주말에 온종일 혼자 아이를 본다는 게 결코 쉬운 결심은 아닐테니 말이다. 막상 나 자신도 그런 선언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후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식사 후 아기와 놀아주려는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감기나 몸살이나 '코로나'도 아닌 것 같은데 정신적 에너지고 육체적 에너지고 완전 고갈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선언했다. "나 내일 반나절만 나가서 쉬고 올 테니 아이 좀 봐 줘"



사실 지난 겨울, 남편이 아직 휴직중일 땐 설 연휴를 틈타 교대로 자유의 날을 보낸 적이 있다. 무척 추워서 집에서 뒹굴고 싶은 날이었지만 어차피 집에 있으면 공동육아가 돼버릴 게 뻔하므로 중무장을 하고 밖에 나가서 반나절을 있다 들어왔다. 그 후 남편이 복직을 했고 나만의 시간은 거의 1시간도 갖지 못했다. 물론, 회사 일 틈틈이 커피 한 잔 하며 한숨 돌리거나, 아이가 잠든 후 옆에서 핸드폰을 만지며 쉬는 정도의 휴식은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대기조' 상태였지 완전한 휴식은 아니었다. 가끔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도 집안일을 하거나 혹은 그냥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취침은 휴식이 아니다. 따라서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모처럼만에 생긴 휴식시간을 어떻게하면 보다 '질 좋게' 보낼 수 있을지 연구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놀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심지어 일을 하지도, 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책을 읽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고 아무튼 일절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워킹맘만큼 하루하루 분초를 '생산적'으로만 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밖에서는 임금노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이 모두 쉬는 순간에도 아이를 돌보거나 가족들을 위해 집안일을 하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내 몸과 마음이 쉴 틈은 정말 갖기 어렵다.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혼자 카페에 가면 늘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도 일부러 집에 두고 나왔다. 노트북을 켜면 나도 모르게 주중에 할 일을 미리 찾아보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웹서핑만 한다고 쳐도, 그 역시 질좋은 휴식을 위해서는 방해일 뿐이었다. 일부러 스마트폰조차 잘 보지 않았다. 카톡 알림도 꺼 두고, 책도 가져가지 않았다. 아주 쉽고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조차 극도의 번아웃 상태에서는 피로한 활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조용한 카페를 찾아서 1인석에 앉았다. 커피 한 잔과 디저트 하나를 시켜놓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일부러 머릿속을 비우고, 집에 있는 아이와 남편에 대한 고민과 생각과 걱정을 내려놓고

창가에 비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눈이 편안해졌다. 각종 디지털 기기에 '절어 있던' 눈이 잠시 액정 밖을 벗어나니 안구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신기할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에 가득 차있던 긴장감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도서관에서 읽고싶던 책 몇 권을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육아서를 빌렸지만 휴식의 날이기 때문에 읽는 것은 다른 날로 미뤘다. 

그 후로 몇 주가 흘렀다. 다시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만큼의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많이 나아진 느낌이다. 어째서 '자유부인'을 해도,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핸드폰 게임을 하고 책을 읽어도 자꾸 피곤한지 의문이 든다면, 가끔씩 나처럼 '아무 것도 안 하는'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 한다. 이미 현대인은 워킹맘이든 아니든 자녀가 있든 없든 이미 너무 다양한 자극으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다. 그것이 놀이이든 오락이든 업무이든 어느 정도의 피로감을 주는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잠시나마 모두에게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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