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핀을 세우는 일에도 실무자는 따로 있다

by 나나용

이 연재의 지난 화를 쓸 때만 해도 아빠가 빨간 옷을 입은 이집트 여자와 눈 맞추며 골반 댄스 췄던 게 분명히 내 첫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집트에 가기 전이었을 기억 장면이 내 무의식- 아, 정확히 말하면 전의식-에서 떠올랐다(프로이트의 의식 구조 배운 걸 드디어 여기서 써먹네..).

이미 발행된 02화를 없던 일로 하기에는 라이킷을 누른 사람이 2025년 8월 5일 오전 11시 35분 기준으로 28명이나(?) 되기 때문에 기억의 순서는 포기하기로 한다.


진짜 첫 기억 속에서는 내가 아마 24개월쯤이었나 보다. 이집트를 갔던 게 내가 30개월 때였고, 그 이후로는 가나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그 이후일 수가 없다.

그렇게 어린데 어떻게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기억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나도 내가 지어낸 기억인가 싶어서 내가 가진 아날로그식 사진과 테이프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기억의 주 소재가 되는 플라스틱 볼링핀의 흔적은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특정 내용이 물리적으로 기록된 바가 없다.


몇 개월 전, 우리 엄마보다 10살 어린 나의 이모와 대화하다가 옛날옛적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가진 첫 기억 장면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 이모는 이렇게 반응했다.


아니, 그게 기억이 나~~~!!?


그러게요.... ㅎ


아무래도 난 기억 천재는 무슨 영재였던 걸까. 그런데 특출났다기에는 어제 뭘 먹었는지도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나나용 영재 설’은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한다. 아니, 한탄을 해보자면, 내 방 에어콘 리모콘이 없어져서 남편한테 다른 방으로 가져갔냐고 근거 없이 탓하고 정신차려 보면 그 리모콘이 마법처럼 내 손에 들려있는 경우가 있다. 아니…많다…. 사실 허다하다.


어쨌든 지난 화의 아빠가 이집트 집시랑 눈 맞은 이야기(?)는 유튜브 쇼츠같은 형태로 저장돼 있다면, 이번 기억은, 왜... 그......!

(말이 생각이 안 나는 중... 원래 30대부터 그렇단다.... 하..)


그…! 그거 있잖아요…!
그 옛날에 장난감 쌍안경 같이 생겼는데, 눈을 갖다 대면 뜬금 없는 예쁜 풍경 사진이 보이고, 쌍안경 옆에 달린 레버를 내리면 다른 그림으로 바뀌는 그런 게 있었잖아요…!!
아아- 이름 말하지 마세요!!
아~~ 뭐였더라…?


당시에는 굉장히 신박한 아날로그한 장난감이 있었는데... 참.... 지금 생각해보면.. 풍경 그림을 돌려 보는 장난감이 진짜 재밌었던 건가.....?


결국 (자존심이 매우 상하지만 기억 못해서) 찾아보니까 이 장난감의 이름은 뷰마스터(View Master)였단다.


와- 저 아날로그한 자태, 진짜 추억돋네…


1994년에 형성된 내 (진짜진짜) 첫 기억도 이 장난감처럼 여러 장면이 이어진다.


첫 장면에는 내가 바닥에 앉아있다. 그 자리에 우리 엄마도 있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두 번째 장면에는 내 앞에 하늘색 볼링핀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 연재의 표지에 내가 그 볼링핀 하나를 들고 있다. 나는 핑크색이었나,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간 큰, 연한 핑크색의 공을 들고 좋아한다.

마지막 장면에는 여러 개의 볼링핀이 널브러져 있고 나는 까르르, 즐거워 한다.


끝이다. 쓰고나니 참 별거 아니다.


그런데 역시 같은 일에 대한 각자의 시선, 기억이 다르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 우리 이모에게 이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기억이 있어요, 재밌죠, 정도를 말하려는 게 다였는데 알고 보니 그 자리에 우리 이모도 있었단다.

내 기억에서 누락된 비운의 주인공, 우리 이모.


'이모 버전' 기억은 이러하다.

우리 엄마는 당시에 만 31살, 이모는 만 21살이었다. 나의 엄마이자 이모의 언니는, 우리 이모에게 엄마같은,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그런 존재였다.


그런 우리 엄마가 이모에게 볼링핀을 세우라고 했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쇼맨쉽 있게 플라스틱 볼링공을 던지는 주인공, 우리 엄마는 즐거워하는 관객, 그리고 이모는 이 공연이 계속 되려면 누군가는 해야 할 업무를 수행하는 실무자였다.


당신은 다 마신, 가벼운 플라스틱 물병을 일렬로 세워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가볍고 길다란 플라스틱은 잘 넘어지기 마련이다.


자.. 우리 이모는 볼링핀- 아마 총 10개를- 조심히 세운다.

나는 주인공다운 몸짓으로 재빠르게 공을 던져 볼링핀을 모두 쓰러뜨린다. (아무래도 나는 두 살 이후로 운동 신경이 꾸준히 감소했나 보다.)

관객에게 특화된 쇼를 관람하며 우리 엄마는 매우 즐거워 한다. 뭐.. 내 자식 재롱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있을까.


그런데..!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동생아, 얼른 다시 세워 봐!!


우리 이모는 무게 중심이 다소 불안한 볼링핀을 세운다.

나는 눈치 없이 공을 정확히 던져서 한순간에 다 무너뜨린다.

엄마는 마냥 즐거워 한다.


이모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과정을 굉장히 많이 반복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언니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냥 했다고 한다. (착하셔……)

그렇지만 언제 끝나지, 싶기는 했단다.


역시,

- 겉으로 티나지 않는 실무를 하는 사람에 대한 인정이 늘상 부족하다.

- 내 눈에 힘든 게 안 보였다고 그 사람이 안 힘든 건 아니다.

- 내가 즐겁다고 꼭 상대방이 똑같이 즐거운 건 아니다.

- 묵묵히 일하는 실무자라고 일 안하는 게 아니니까 꼭 보상을 하자. (다행히 우리 엄마는 보상을 톡톡히 하는 편이었다.)


..이제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싶다.

음, 2000년대 초반 방송 프로그램에서 쓰는 치트키(cheat key)같은 방법이 있었다.

진행자가 슬슬 마무리 짓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없으면 꼭 하는 게 있었다.


“자, 그 마음을 담아서 이모에게 영상 글 편지 하나 띄우시죠~”

(갑자기 왠지 어디서 들어본듯 한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나오고)

(핑크색 꽃으로 둘러싸인 프레임이 나타나고)

(프레임 아래쪽에 진한 핑크색, 흘림체로 쓴 “사랑하는 이모에게” 문구가 나타나고)

(나는 카메라를 어색하게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과 목소리로,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이모~

볼링핀 계속 세워주셔서 감사해요~

이모가 어렸을 때 저 놀아주신 거 덕분에 제가 잘 컸어요(???).

저희 앞으로도 행복하고 재미있게 잘 살아요~~

.. 사랑해요...~~~ (양 팔로 하트) 이게 빠지면 영상 편지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