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기억은 재미있게도 스냅숏(snapshot)이 아닌, 무려- 비록 흐릿할지언정- 유튜브 쇼츠와 같은 영상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때를 회상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내 눈알 뒷면에 빔프로젝터를 쏜 듯, 당시 상황이 자동 재생된다. 그만큼 이때 일어난 상황이 영유아였던 나에게 엄청난 임팩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뜬금없는 소리를 해보자면, 기억을 영상화할 수 있다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다.
(아닌가, 엄청 부끄러우려나.)
만약에 그런 고도의 기술이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생긴다면 꼭 그 주식에 투자해서 노년에 부자 백수의 꿈을 이루고 싶다.
하여튼 딴소리는 집어치우고, 때는 바야흐로 1995년 5월 초 즈음이었고, 장소는 이집트 나일강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작은 유람선의 다소 어두운 실내였다. 2살 6개월인 나의 인지 능력은 아직 한참 발달 중이었다.
내 기억은 그 유람선 내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초 후에 여러 테이블이 둘러싼 동그란 중앙 무대로 길고 치렁치렁한 자주색 치마를 입은, 두 살배기가 봐도 옷차림이 굉장히 화려한 여자가 등장한다. 잠깐 춤을 추는 것 같더니 갑자기 내가 앉은 테이블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고는 그 여자가 (기억에 갑자기 등장하는) 나의 아빠를 향해 손을 내민다. 아빠는 배시시 웃으며 여자의 손을 부여잡고 의자에서 흔쾌히 일어난다.
그때 우리 아빠가 만 34살이었으니까, 지금의 나랑 또래였구나….
참 세월이란….
아빠는 여자가 이끄는 대로, 무대로 나가서 살랑살랑 허리춤을 함께 춘다. 그 외간 여자와 손을 살갑게 맞잡는다. 참고로 우리 아빠에 대해 말하자면.. 숟가락 마이크라도 손에 쥐거나, 넥타이가 고급 헤드밴드로 탈바꿈할 때면, 골반이 매우, 아니… 과하게 유연해지던 사람이다…. (‘95년 기준, 건설대기업 대리급이라면 그 정도 재롱은 당연히 부릴 수 있어야 했다.) 아마 지금은 허리 나간다고 그런 무브는 못 할듯싶다. 아, 지나간 세월이여.
어쨌든 아빠와 여자는 10초 정도 춤을 이어간다. 그러고는 결말도 없이 머릿속 쇼츠가 급격하게 끝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만 딴생각하거나, ‘다시 보기’를 누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아빠가 우리 테이블로 무사히 돌아오는지,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있었을 엄마와 재회(?)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주민등록초본에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아빠가 빨간 옷을 좋아하는 이집트 집시(추정..)와 눈 맞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2살 6개월의 나는 알게 모르게 나름의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건 역시 왜곡이 있는 법.
작년 이맘때쯤,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아빠가 그때 무슨 배인가…? 하여간 그런 데에서 빨간 옷 입은 여자랑 춤춘 거 기억해?
…? (64년 동안 쌓인 기억 뒤적이는 중)
아니, 그때, 나 두 살 때 여행 갔었잖아~~~
아~~~~~~~ 그거 이집트야, 이집트. 나일강 유람선이야, 그거.
아니, 그러니까… (답답) 무슨 동그란 무대에서 여자랑 춤췄잖아ㅎㅎ 긴 빨간 치마 입은 여자랑.. ㅎ
..?????? 그 사람 남자야~~~
…?????? 그 사람 남자야...........!!?!?!??
그래~~~~~ 허허, 남자야~~~~
…….
그래… 남자도 치마 입잖아….
왜 바로 여자라고 생각했니….
아무리 30개월이었다지만 성차별적인 편견을 가졌던 과거의 나 자신이 굉장히 실망스럽군….
아니- 근데! 성 역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일찍 생긴다고!?
하여튼 작년이 되어서야 아빠는 이집트 나일강에 떠다니는 작은 유람선 안에서 붉은색 치마를 입은 화려한 남자와 잠깐 춤을 춘 죄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내면 아이는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30년 전에 아빠에게 느꼈던 일종의 배신감은 아직 발달 중이었던 내 인지 능력 탓에 일어난, 괜한 오해였던 걸로 싱겁게 마무리됐다.
아빠, 미안...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