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태엽 카메라 Nov 19. 2018

선(線)을 따라 흘러간 추억여행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입은 바싹 타들어갔다. 오디오맨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었다. 재빨리 카메라 속 영상을 확인해본다. 없다.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실수로 포맷했다는 오디오맨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애꿎은 카메라 전원 스위치를 수차례 끄고 켜본다. 영상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취재했던 영상이 깡그리 사라졌다. 뒷수습을 하려니 뒷골이 당겨왔다. 포맷된 메모리카드를 복원하기엔 물리적 어려움이 따랐다. 별도의 제조사 장비가 필요했고,  복원 시간도 많이 걸렸다.  재촬영하는 게 답이었다. 

현장으로 다시 가는 차 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피곤이 엄습하자 내 눈은 가느다래 졌다. 시간의 부족만큼, 기사님의 발은 액셀을 깊게 밀었다. 자연스럽게 차 창 밖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띄엄띄엄 있던 불빛들이 분주하게 선(線)을 만들어나갔다. 게슴츠레한 내 눈동자에 ‘불빛 선’이 더욱 명징하게 비쳤다.

‘그래.. 선..!! 테이프라면 이 사단까진 안 갔을 텐데..’ 공대 공부는 젬병이었지만, 기특하게도 나는 불빛이 만들어 낸 선을 보자, 선형(線形) 방식의 테이프를 생각해냈다. 영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려 생긴 스트레스도 한몫 거들었을 터. 가뜩이나 디지털 장비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으면서도 푸념이 절로 나온 것이었다. 물론 메모리카드의 효용성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우리의 일은 얼마나 편리하게 진일보시켰는가. 하지만 쉽게 쓸 수 있는 만큼, 쉽게 잃어버리기도 한다. 버튼 한 번에 모든 영상이 없어진 지금처럼.. 테이프는 단 한순간에 모두를 지우는 법이 없다. 덮어 씌웠다면 그 부분만 잃어버린다. 전체를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을 다른 영상으로 덮어 씌우는 수밖에 없다. 현장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기특했던 내 머리는 이제 나를 추억 속으로 인도했다. 그새 선을 통해 시작된 연상 작용은 내 머릿속을 선에 관한 추억들로 꽉 채웠다. 추억여행 목적지는 나의 신입시절이었다.

<현재의 eng카메라는 메모리카드로 영상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나는 짱이 될 거야!” 호기로운 시기였다. 나의 입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친구들과의 술자리. 전쟁을 앞둔 장수처럼 친구들에게 포부를 밝혔다. 어느 촬영기자보다 영상취재를 잘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 출정식은 허울에 불과했다. 난 동기 중에 가장 실력이 뒤떨어졌고, 마음만 급해 사고 치기 일쑤였다. 밤늦게까지 선배들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풀이 죽어 말 수까지 줄었다. 촬영기자가 적성에 안 맞는 것을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생겨났다. 그때쯤이었다. 내 앞에 커다란 선(線)이 하나 그어졌다. 실제로 보이진 않지만, 내 가슴속에는 확연히 그어져 있는 선. 그 선 안쪽에 나는 혼자 놓여있었다. 선 바깥쪽에는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선을 넘어 선배들에게 다가설 용기와 능력이 없었다.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그 선은 나를 계속 비루하게 만들었다. 내가 넘을 수 없었던 선을 넘어선 선배들이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매사 어느 취재 건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영상 또한 훌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옹졸한 나를 선 가까이 이끌어 준 것도 선배들이었다. 선배들은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고, 자기 시간을 쪼개어 영상취재의 기본을 다시 가르쳐주었다. 겸손하게 일을 하되, 자신감은 꼭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조금씩 실수가 줄어들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날이 많아졌다. 어려운 환경에서 취재한 영상이 주는 보람도 알아갔다. 

그 덕분에 지금 순간에도 사건사고 현장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선배들처럼 프로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선을 넘었는지 아직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신입시절의 한계와 자만을 깨닫게 해 준 선의 존재에 지금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포토라인은  기자들의 약속이자 룰이다>

이번엔 실체적 선(線)에 관한 추억 이야기다. 포토라인.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선은 우리들의 약속이자 룰이다. 포토라인을 벗어난 취재행위는 반칙이다. 따라서 포토라인을 이용한 자리 경쟁은 우리의 숙명이다. 보통은 포토라인을 서로 잘 지키기 때문에 큰 언쟁이 없다. 하지만 나의 신입시절에 포토라인 문제로 타 종편 스텝과 한 판 붙은 적이 있었다. 나는 현장에 먼저 와서 포토라인에 트라이포트를 세워놓았다. 그 후, 타 종편 촬영 스텝이 내 트라이포트에 너무 가까이 자신의 트라이포트를 붙여 놓았다. 내 카메라 화각을 조금 가리게 된 것이다. 언쟁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쪽의 트라이포트가 내 화각에 방해가 되니 좀 떨어져서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방해될 것이 없는데 내가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서로 대화가 안 되니, 곧이어 고성이 오고 갔다. 그때 그 촬영 스텝이 “너 몇 연차야?”라며 나이를 운운하며 따지고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만 많을 뿐, 기자 경력은 미천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불리해지니, 나이를 들먹이는 모양새가 여간 성가실 수 없었다. 나는 “네가 기자냐!” 하며 쏘아붙였다. 답을 하지 못한 그가 성만 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타사 기자가 말려서 언쟁은 일단락이 되었지만 그 후, 각사 정보보고에 그 언쟁이 올라간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회사에도 이 에피소드가 급속도로 퍼졌다. 더욱이 타 종편들은 기자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촬영기자를 하고 있어, 업계 전반적으로 우려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찰나에 내가 기자 신분이 아닌 사람이 취재윤리에 대해 논한다는 것에 통쾌하게 한 방 먹인 셈이 되었다. 다툼에도 불구하고 격려와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 다툼의 원인은 포토라인에 있다. 포토라인 규칙에 입각해 나는 정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했다. 문제는 타 사 촬영 스텝이 포토라인 규칙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수많은 포토라인을 접하며 취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떠한 마찰도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촬영 스텝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사뭇 궁금하다. 그가 나이 어린 사람과의 다툼으로만 기억한다면, 그는 여전히 포토라인 보도준칙에 어두운 방송인일 것이다. 


<취재현장에서 식사를  해야 될 때, 자장면만큼 이동성과 신속성, 그리고 포만감을 갖춘 음식은 찾기 힘들다 >

짜장면은 우리가 가장 자주 먹는 메뉴다. 누구나 좋아하고 간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짜장면은 잘 비벼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먹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면은 선(線)이다. 나는 짜장면을 면, 즉 선으로 먹지 않고 덩어리째로 먹은 추억이 있다. 

수습 시절이었다. 인천에서 일어난 사건을 챙기라는 지시를 받았다. 추석을 앞두고 성묘를 하다가 친척끼리 싸움을 했다는 게 취재내용이었다. 방송시간까지 빠듯할 것 같아 점심을 거른 채 경찰서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증거물을 촬영했다. 서툰 솜씨로 빠르게 촬영을 하려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옆에 있던 형사 분이 티슈를 뽑아 건넸다. 땀 좀 닦고 하라면서 밝게 웃었다. 고마움도 표현 못하고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사건 현장인 인천가족공원으로 갔다. 자동차 진입이 힘든 곳이 사건 현장이라 꽤 걸어갔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어 심리적으로 크게 쫓겼다. 취재를 마치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인천에 지사가 없어 경찰서에서 영상을 송출하는 게 가장 빨랐다. 경찰서 도착 후에 급히 노트북을 꺼내 송출 작업에 열중했다. 티슈를 건넸던 그 경찰이 내게 와 식사는 했냐며 물어봤다. 바로 전, 취재기자와 내가 밥도 못 먹었다며 서로 투정한 이야기를 들은 눈치였다. 자기가 짜장면을 배달시켰으니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짜장면이 배달됐다. 특유의 춘장 냄새가 사무실 전체를 매웠다. 코가 반응하니, 배는 급속도로 허기졌다. 일을 빨리 마치고 짜장면을 먹고 싶었으나 노트북이 말썽이었다. 영상을 파일화 하는 과정에서 노트북은 계속 멈췄다. 시간은 길어지고 짜장면은 불고 있었다. 결국 배달된 지 1시간을 훌쩍 넘어선 다음에야 짜장면과 마주했다. 어렵게 만난 짜장면이었지만 문제가 또 발생했다. 짜장면이 안 비벼지는 것이었다. 퉁퉁 불어 나무젓가락을 꽂으면 덩어리째로 달려 나왔다. 배가 너무 고픈지라 할 수 없이 빵처럼 씹어 먹기로 했다. 그래도 꿀맛이었다. 절반가량 덩어리째로 먹으니, 자장면 줄기가 하나둘씩 풀려 선으로 변했다. 그제야 젓가락질이 가능해졌다. 

아쉽게도 덩어리 짜장면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물며 그 뒤로 단 한 번도 경찰서에서 짜장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경찰서 취재 문화가 급격하게 바뀌어간 게 이유였다. 특히, 촬영기자와 경찰과의 관계는 예전보다 피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경찰서에 들러 취재만 하고 가야 하는 상황이 대다수다. 또 다른 취재가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차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사건 뉴스는 촬영기자의 역할이 가장 큰 분야다. 역할에 충실하려면 경찰이라는 취재원과의 교류는 필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은 부분이 아쉽다. 불은 짜장면은 경찰의 따뜻한 정이었다. 상대를 진정으로 바라봐준 매개체였다. 어쩌면 불은 짜장면은 영영 맛볼 수 없을지 모른다.




“선배, 도착했어요.” 보도차가 서자 오디오맨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나마 추억여행이라는 단꿈을 꿔서 그런지 개운했다. 다시 갔던 현장은 다행스럽게도 변함이 없었다. 메모리카드 안에 현장을 담았다. 현장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차곡차곡 쌓였다. 신기하게 이런 디지털 신호는 다시 변환되어 TV 화면에 나온다. 기계적 절차에 따라 오차도 없이 실행되는 모습에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신입시절의 추억은 어떻게 쌓여있을까. 머릿속에서 꺼내보았지만, 가슴이 따뜻해진다. 

코 밑은 괜스레 바람을 느끼는지 간지럽다. 센티함까지 더해지는 걸 봐선 내 추억은 꽤나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듯하다. 이런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질 것이다. 신입시절의 추억을 내가 지천명을 넘겼을 때 다시 되새김한다면 이렇게 끄적일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센티함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갑자기 지금 쓰는 추억 저장 작업이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도 이 글을 보며 내 신입시절을 떠올리고 싶다. 그리고 지금의 순간도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적어야겠다. 메모리카드보다 훨씬 인간적인 나만의 글쓰기 저장방법으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궁극의 요리백서를 찾아서 (feat. 촛불집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