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갈 땐 악 소리, 내려올 땐 콧노래
아내의 뱃 속에 올해 시집간 딸아이가 자라고 있던 30년 전 어느 가을날 해인사로 단풍구경을 왔던 내겐 특별한 추억이 있는 산이다. 그리고 7년 전 이 산을 왔었는데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때도 이 기억을 떠 올렸었다.
오늘 날씨는 정말 맑고 청명하다. 코발트빛 하늘이 겨울산을 더 단단하게 빚어놓은 듯하다.
12월 초의 가야산 야생식물원 주차장. 공기가 다르다. "이 길은 매우 어려움 등급입니다"라는 경고판 앞에서 몸을 충분히 풀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였다. 탐방지도에 난이도를 알려주는 색깔이 검정색인 만물상코스다.
� 코스 개요
일시: 2025년 12월 6일 (토)
날씨: 초겨울 맑음, 능선 바람도 조용한 청명한 날
코스: 백운동 → 만물상 → 상아덤 → 서성재 → 용기골 → 백운동
거리: 5.93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휴식 포함)
난이도: ★★★★☆
신들의 정원으로 가는 길
초반부터 약 1시간 동안 급경사가 쉼 없이 이어진다. 바위와 바위 사이, 소나무가 터널을 만든 좁은 길을 비집고 오른다. 햇살이 가지 틈새로 쏟아져 내려 바위 위에 얼룩무늬를 새긴다. 초반부터 페이스조절에 신경을 많이 썼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시야가 탁 트였다.
멀리 심원사가 아득하고, 푸른 빛 하늘이 첩첩이 둘러 선 산 사이로 진한 음영을 드리운다. 골골이 산그림자가 누워 산 아래 마을을 더 또렷하게 보이게 한다. 저 멀리 수평선처럼 희미한 산줄기들이 실루엣으로 층층이 겹쳐 있다.
오르락내리락 바위를 딛고 올라서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산행이 재미나다. 마주 선 바위 사이길을 걷는 동안 좌우로 코끼리, 거북이, 시주 나온 탁발스님 같은 바위,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능선을 따라 춤을 추듯 솟아있는 틈을 타고 들어간다.
바위틈에 자란 생명
만물상 탐방로에는 바위틈에 자란 멋진 소나무들이 유독 많다. 척박한 바위를 뚫고 나온 소나무는 마치 서예가의 붓놀림처럼 꺾이고 휘어져 있다. 어떤 것은 거의 수평으로 누워 허공을 껴안고, 어떤 것은 바위를 감싸 안고 하늘로 향한다.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하늘은 짙푸른 캔버스처럼 깊고, 그 아래로 첩첩산중이 수묵담채의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가까운 산은 짙고, 먼 산은 연하다. 산과 하늘 사이 어디쯤에서 경계가 사라진다. 공기원근의 매력이다.
하늘을 향한 빨간 사다리 계단
상아덤으로 가는 길목에 빨간 난간의 가파른 계단이 여러 번 나타났다. 계단은 거의 수직에 가깝다. 경고판이 서 있다. "낙상위험 구간입니다." 난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른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이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려 있다. 저 아래로 능선이 굽이치고, 계곡이 깊게 파였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세상이 점점 작아진다. 건너 온 산 저쪽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손을 흔들어본다.
달의 정령이 사는 곳, 상아덤
달의 정령인 상아와 바위가 합해져서 생겼다는 상아덤. 안내판에는 "가야산은 대가야의 시조설화가 서려있는 산으로 예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이름 높은 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곳 상아덤은 달에 사는 미인의 이름인 상아와 바위를 칭하는 덤이 합쳐진 단어로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 신 이비가지가 노닐던 전설을 담고 있다.
기어오르다 고개를 들면 발아래 세상이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묵향 베인 그림처럼 단아하지만 힘찬 획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어떤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고, 어떤 바위는 입을 벌린 코끼리 같다. 자연이 빚은 조각품들이다.
만물상이 그려진 병풍을 뒤로 두고 상아덤 데크에서 반대쪽으로 올라온 일행을 만났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차와 도시락을 나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뒤쳐진 회원을 기다리다 바위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만물상, 신들이 빚은 정원
능선을 따라 펼쳐진 만물상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바위봉우리들이 끝없이 솟아 있다. 어떤 것은 칼로 자른 듯 날카롭고, 어떤 것은 둥글게 깎여 있다. 바위들 사이사이로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저 나무들은 어떻게 저 척박한 바위틈에서 살아남았을까.
좁은 바위 사이 길을 지나며 만물상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바위와 바위가 마주 서서 문을 만들고, 그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파란 하늘 조각이 바위틈에 박혀 있다.
능선 곳곳에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첩첩산중 너머로 먼 마을이 보이고, 강줄기가 모인 저수지는 은빛으로 빛난다. 겨울 햇살이 산그림자를 짙게 만들어 산세를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서성재에서 멈춘 이유
만물상의 거친 바위와 씨름한 끝에 서성재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만물상과 용기골, 정상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교차로다.
칠불봉이나 상왕봉 정상을 가지 않았다. 무리한 정상 정복보다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비록 정상석은 못 봤지만, 만물상 능선만으로도 가야산의 진가는 충분히 느꼈다. 산은 정상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르는 길 내내 펼쳐진 풍경이 이미 선물과도 같았다.
용기골, 부드러운 위로
하산 코스는 용기골을 택했다. 올라올 때의 날카로운 바위들과는 정반대다. 편안한 흙길과 나무 데크가 이어지고, 계곡 물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올라올 땐 악 소리 나더니, 내려갈 땐 콧노래가 나온다. 긴장했던 근육이 풀리는 기분이었지만 곳곳에 숨은 너덜길에서는 스틱을 부지런히 사용하며 무릎을 보호했다. 오래 오래 산행하려면 하산 스틱은 필수다.
시간이 여유로워서 하산길은 느리게 걷는다. 이끼 낀 바위, 낙엽 쌓인 계곡,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가지. 가야산의 속내를 자세히 보고싶었다.
오후 4시 경에 백운동탐방지원센터로 돌아왔다. 먼저 내려온 일행들이 막걸리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막걸리 잔을 맞대며 오늘 하루를 되새긴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다.
다시 오고 싶다. 이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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