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첫 계곡산행의 예상치 못한 교훈 과 문경소방서 구조대원 이야기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났다. 새벽 공기가 오래만에 바짝 말라서 새 옷을 입은 듯 기분이 좋다. 하반기 7월 첫 산행지는 경북 문경의 대야산이다. 속리산국립공원 일부에 속한 이곳은 용추계곡과 주변의 선유동천, 화양계곡이 여름산행의 인기 명소로 알려져 있다.
계곡 물놀이를 정말 좋아하는 아내는 출발 전부터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회장님도 돌아왔고, 날씨도 좋고, 산행을 즐기기 더할 나위 없는 그런 날이었다.
산행계획을 설명하면서 "좋은 날이라 더 조심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살아오며 얻은 교훈 중 하나는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더 조심하는 습관이다. 순조로울 때 뭔가 잘못되는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복선이 될 줄이야.
순조로운 시작
예상대로 버스는 출발 두 시간 만에 용추계곡주차장에 도착했다. 계획대로 가볍게 체조로 몸을 푼 다음 산행을 시작했다. 총 10.3킬로미터, 물놀이 시간을 포함하여 6시간의 산행 일정이었다.
용추계곡에서 폭포를 지나 피아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위산으로 유명한 대야산은 그래서 아름답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이다. 정상을 4-500미터 남긴 코스는 어떤 상급코스 못지않았다. 간만에 힘을 써야 했다.
계획대로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도착해 점심자리를 잡고 일행을 기다렸다. 후미가 도착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할 즈음 무전이 울렸다.
"환자 발생!"
예상치 못한 상황
궁시렁의 시시껄렁한 농담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시간이 너무 걸렸고, 마지막 무전에서 "정상 10분 남은 거리"라고 했는데 아직도 10분이 남았다는 것을 보니 멈춰 있는 것이었다.
후미가 도착하고 상황을 보니 일행 중 보람이가 쥐가 난 것이었다. 후미대장과 회장님, 궁시렁 모두가 합심하여 보람이를 안전하게 잘 데리고 왔다. 식사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아는 지식 내에서 응급처치를 하려고 애썼다. 이 사람, 저 사람 아는 모든 상식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내가 아는 상식이 제대로 된 응급처치 방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처방으로 보람이가 더 악화되는 상황을 며칠 전 응급처치 연수에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119구조대와의 만남
다행히 119구조대에 연락이 되었나 보다. 연신 구조대와 통화하며 원래 코스였던 밀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보람이를 정상으로 데리고 온 회장님, 전회장님, 부회장님, 후미대장 그리고 궁시렁까지... 궁시렁은 평소에는 실없는 소리로 사람들의 분위기를 띄우지만 이런 상황에는 늘 솔선수범하는 친구다. 119 연락도 궁시렁이 한 모양이다. 119구조대원을 만나고 보람이는 더 힘을 내는 것 같았다.
보람이의 고통이 얼마나 클까? 쥐가 난 다리의 통증도 참기 힘들겠지만, 바쁜 구조대가 자신을 위해 산으로 출동한 것과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하산시간이 늦어져 기다려야 할 회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도 그 마음을 잘 안다.
35년 전 행군의 기억
시간이 거꾸로 35년 전으로 치달렸다. 유학을 떠난 선배의 미술학원을 3학년 때 인수받아 운영하던 나는 대학 졸업 이후 면제인 줄 알았던 군복무를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학생들이 하교한 뒤 저녁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학원 특성상 불규칙한 일상에 마치면 늘 술로 피로를 풀던, 건강에 극도로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생활을 하던 때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30사단 신병교육대... 다른 훈련은 다 할 만했는데 군훈련의 꽃이라는 행군만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짧은 거리를 연습할 때도 발바닥은 온통 물집으로 뒤덮였고, 심할 때는 피가 나서 치료하는 데 너무 힘들었다.
입대 전 불규칙한 생활이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틈나는 대로 걷기 연습을 했다. 본격적인 100킬로 행군을 앞두고 계속 연습하고 체력을 좀 키웠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20킬로도 안 되었는데 발은 굳어왔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멈추면 안 되는 것,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부대의 특성상 나의 낙오는 함께 훈련해온 전우들에게 그야말로 민폐였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낙오의 두려움이 너무 컸다. 후반부로 갈수록 고통은 더해졌고, 나의 총과 군장은 전우들이 나눠 짊어졌다. 나를 선두로 보내서 끌다 밀다를 반복하며 내 낙오를 막고 있었다. 고통의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틀 무렵 행군이 끝났다. 고통보다 환희에 가까웠다. 나로 인해 함께한 전우들이 고통받지 않는다는 기쁨이 가장 컸다. 그리고 무한한 고마움이 밀려들었다.
행군이 힘들었던 나는 즉시 면담신청을 했다. 행군이 반인 예비사단의 특성상 나는 군대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면담 후에 알았다. 나는 보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제1군단 직할 포병대대로 배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군은 없을 거라고...
포병에도 행군은 있었다. 유격장으로 이동할 때였다. 말년병장 시절, 그때 나는 빠질 수 있는 행군이었다. 전역을 앞두고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참여했다. 입대 후 규칙적인 생활로 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때 행군이 내 군대생활의 오점처럼 느껴져서 극복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전역하고 나면 다시는 이런 도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은 군생활을 떳떳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20킬로도 못 가서 나는 죽을 듯한 고통을 참고 행군을 해야 했다. 이제는 말년병장이라 티도 못 내고 해야 했다. 총을 들어주던 전우도 군장을 대신 매어주던 전우도 없었다. 오롯이 혼자 견뎌야 했다. 다행히 유격장에서 돌아오는 행군은 거리가 그래도 50킬로밖에 안 되어서 살았다.
이번에도 발은 아작이 나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친분관계를 쌓아놓았던 군의관에게 보여줬더니 한참 발을 쳐다보더니 "야! 너 평발인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평발... 이럴 수가, 내가 평발이라니? 그래서 힘들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역을 앞둔 이 시점에 알다니. 입대 전에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군대 오지 않았을 터인데, 정말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함께 내려온 길
이 이야기를 함께 내려오던 보람이에게 해주면서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미안함에 대해서 공감한다고 해주었다. 밀재에는 만일을 대비하여 7명의 대원들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보람이가 거동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번갈아가며 보람이를 이동시킬 모양이었다. 건장하고 믿음직한 대원들이었다. 친절했고, 보람이를 배려했다.
모두 문경소방서 소속 대원들이라고 했다. 가은지구와 또 다른 한 곳이다. 평소에도 119구급대원에 대해 나는 우리 사회에서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자신의 희생을 무기 삼아 국민의 안위를 지켜내는 영웅이라고 생각하던 터라 막상 도움받는 상황에 직면하니 감사함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밀재에서부터 회장님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먼저 내려보내고 산대장의 직무를 다하고자 보람이와 10명의 구조대원이 함께 내려왔다. 길고 길었다. 보람이는 오죽했으랴. 미안함을 덜어주고자 계속 말을 걸었다.
마음을 담근 산행
월영대까지 내려오니 산행 완료 시간에서 벌써 1시간이 지났다. 회원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월영대에서 가은지구 소속 앰뷸런스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역시 우리 회원들은 긴 시간을 기다리며 모두가 걱정해주고 있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나중에 보람이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대야산의 시원한 계곡에 몸을 담그지는 못했지만 회원들의 사랑에 마음을 담근 산행이었다. 보람이는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준비운동을 못했다고 한다.
준비운동, 꼭 빼먹지 맙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문경119구조센터 대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당신들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문경소방서 구조대원의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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