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바다 위의 선물 무의도
새벽 공기가 축축했다. 장마가 코앞에 다가온 6월 셋째 주, 월악산 대신 무의도를 택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까?
애초 계획은 월악산이었다. 악산으로 유명한 만큼 험하지만 풍광이 뛰어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라 회원들의 참여도가 높았다. 하지만 요즘 AI 탐구와 프로그램 개발,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로 바쁜 와중에도 월악산 산행 계획에는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산행 대장을 맡기 전에는 배낭만 메고 나와서 앞사람만 따라가면 되던 시절이 그립긴 하다. 그때는 특별한 고민 없이 이끄는 대로만 참여하면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었다. 산행 대장을 맡고 보니 그동안 집행부의 노고가, 특히 산행 대장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선배님들 존경합니다.
산행일이 가까워지면서 장마도 함께 다가왔다. 특히 산행일의 비 예보는 하루 종일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는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면 월악산의 아름다운 피부는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고, 드러낸 멋진 뼈대도 미끄러워 위험하다"는 온라인 산우님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산행 예약을 취소하는 회원들도 많이 늘고 있었다.
집행부와 상의해 산행지를 바꾸기로 했다. 예보상 경기와 강원 쪽은 오전에만 비가 온다 하니 산보다는 바닷길 트레킹이 나을 듯했다. 무의도 트레킹은 비가 오더라도 해안 데크길을 걸으며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산행일 새벽, 가는 비가 추적거리더니 해가 뜨면서 비를 몰아낸 듯 먹구름은 살짝 물러나 있었다. 좋은 신호였다.
버스 안에서 해안 트레킹을 산행으로 변경했다. 무의대교 입구에서 국사봉, 호룡곡산을 거쳐 광명항으로 도착하는 코스였는데, 시간이 넉넉해서 하나개큰해수욕장의 환상 데크를 걸을 수 있는 코스를 추가했다. 무의도에 왔다면 해안 데크길을 안 보고 온다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무의도 트레킹 코스에서 국사봉 쪽으로 선두를 잡고 올랐다. 지난밤 비가 억세게도 내린 모양이다.
길을 따라 내린 비가 뿌리를 갖지 못한 것들을 쓸어내리고 거세고 난폭한 정리를 한 다음, 화장을 한 듯 안개로 지난밤의 성난 표정을 감추는 듯 보였다.
비에 씻긴 무의도는 정갈함만 남아 있었다. 촘촘하게 엮여 있는 거미줄과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 하나하나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돌았다. 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었지만 신비로웠다.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어릴 적 즐겨보던 '전설의 고향', 옥녀의 한 같은 드라마를 떠올렸다. 발소리도 안개에 스며들어 부드러워졌고, 회원들의 대화 소리마저 몽환적으로 들려왔다. 이런 고요함은 맑은 날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로는 안개가 살짝 걷히며 숨겨져 있던 풍경을 드러내 보여주나 싶었는데, 아쉽게도 다시 베일을 씌우곤 했다. 평화로웠지만 실미도나 주변 섬들을 바라볼 기회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무의도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국사봉을 올랐지만 조망 대신 이런 서정적 분위기를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구름다리를 건너 호룡곡산으로 곧장 가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후미를 맡아주고 있는 궁시렁에게 계속 무전으로 안내를 했다. 그런데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 예상과 달랐다. 도로 확장 공사 중이었는데 어제 내린 많은 비로 가는 길이 온통 진흙탕길이었다.
"괜한 결정을 했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한 무리의 회원들에게 코스를 묻는 전화가 와서 구름다리를 건너 바로 호룡곡산으로 진행할 것을 권했다. 자연히 후미팀도 그들을 따라 바로 호룡곡산으로 향했고, 나를 비롯한 10명 가량만이 하나개큰해수욕장을 통과하여 환상 데크길을 걷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다로 향했다. 비에 젖은 풀잎들이 발목을 간질였고, 축축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바다 데크길. 회색빛 하늘과 잔잔한 파도가 만나는 경계선이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안개에 휩싸인 바다는 평소보다 더 깊고 고요해 보였다.
예상대로 해안 데크길은 너무 좋았다. 모든 회원이 함께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미안함이 마음 한편에 또아리를 틀었다.
호룡곡산을 지나 종착지에 도착해보니 많은 회원들이 산행을 일찍 끝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 데크를 걸었던 회원들이 도착하자마자 예정된 식당으로 출발했다.
무의도 주변 바다에서 공수한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해물칼국수가 주문되어 있었다. 바지락과 새우, 낙지가 들어간 국물이 진하고 시원했다. 쫄깃한 면발과 함께 입에 넣으니 바다의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꿀맛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회원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어떤 분은 "이런 맛에 무의도 오는 거 아닙니까?"라며 웃었다. 정말 그랬다. 멋진 조망은 안개에 가려 놓쳤지만, 이런 바다의 맛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회원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이런 가벼운 산행도 좋다. 정상 정복에 대한 부담 없이 자연을 만끽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하루. 멋진 산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무의도가 선사한 다른 매력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늘 그렇지만 때로는 계획과 다른 길을 걷는 것도 여행의 묘미니까.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주변 섬들이 언젠가는 맑은 날씨에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겠지. 그때 다시 오면 되니까. 그리고 그때는 또 다른 맛집도 발견하게 될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