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깨달음을 따라 걷는 길 -대구 팔공산 산행기

714개 계단 너머에서 만난 팔공산의 참모습

by 난달

# 원효의 발자취를 따라


코끝에 닿는 공기가 뽀송뽀송한 느낌의 상쾌한 아침이다. 마치 세상이 밤새 빨래를 해서 널어놓은 듯, 공기마저 깔끔하게 다림질된 기분이었다. 3주 만의 산행이라 그런가, 반가운 얼굴들을 맞이 할 마음으로 가슴 한편이 설렜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구의 진산, 팔공산.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여덟 개의 고을을 품은 산, 여덟 봉우리에 신선이 노닐던 산이라 했던가. 한두 번 와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정상 비로봉의 철탑들만 흐릿하게 기억에 남았고, 갓바위를 향해 무작정 강행군했던 피로만 남아있던 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지난 덕유산에서 용구형님과 원상형님의 조언으로 깨달은 게 있었다. 산은 혼자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 좋은 동행자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산행의 묘미라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도 두 분께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아직은 현직의 바쁜 일상에 치여 차일피일 미루던 산행 계획을 답답해하던 용구형님이 원상형님의 제안을 받아 코스를 추려주셨다. 군위 쪽 들머리로 시작해서 오도암과 원효굴, 청운대의 풍광을 감상하고, 비로봉-동봉-서봉을 거쳐 시원한 수태골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이거다!" 싶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코스를 선택했다. 산행이 끝난 지금도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때로는 경험 많은 이의 조언이 수십 번의 고민보다 값지다.


***


동산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해 보니 주말임에도 역시나 등산객이 한산했다. 주차장은 비교적 크고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그곳까지의 진입로가 만만치 않았다. 대형버스가 들어오기에는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좁고구불구불한 길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산악회 버스들이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군위 쪽이라 대중교통 접근도 어렵고, 원점회귀를 해야 하니 자연히 발길이 뜸할 수밖에.

이 한산한 주차장 덕분에 여유롭게 몸풀기 체조를 하고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베리 굿!


시원한 푸르름이 원효대사 구도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이정표도 잘 세워져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부처님 오신 날에 걸어둔 듯한 연등들이 길 모퉁이마다 달려 있어 우리를 인도했다. 천 년 전 원효대사는 진짜로 이 길을 걸었을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선두에서 후미까지, 우리 일행은 뱀꼬리가 몸을 저어 나아가듯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계곡은 좀 말라있었다. 대구 지역이 한동안 가물었나 보다 싶을 즈음, 오도암 입구가 나타났다.


싸리로 문이 나 있고 '등산로 없음' 표시가 있었다. 작은 암자 하나 정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들어섰는데, 어라 웬걸! 커다란 세 채의 암자가 나타났다. 입구의 소박함과는 너무나 다른 이미지에 놀랐다.


여행을 왔다면 오도암에 들러 자세히 둘러봤을 텐데, 산행을 이끄는 입장이라 아쉽게도 오도암의 이미지만 눈에 새기고 하늘정원 쪽으로 올랐다. 때로는 리더의 책임감이 개인적 호기심을 억누르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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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714개가 하나의 거대한 시련처럼 버티고 있었다. 난이도 최상의 코스였다. 계단 하나의 높이도 다른 지역보다 살짝 높아서 마치 1000개와 맞먹는 것 같았다. 평소 단련해 온 하체 근육이 아니라면 많이 힘들 만한 구간이었다.


700개째 계단 즈음에 원효굴로 가는 잔도가 있었다. 기대가 컸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바로 그곳이 아닌가. 호기심이 발길을 재촉했다.


원효암에서 바라본 비로봉 쪽 풍경은 웅장하고 멋졌다. 하지만 정작 원효굴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자연동굴인 것 같았는데 수행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입가에 살짝 풋웃음이 머물렀다. '마음이 깨달으면 해골 속 썩은 물도 감로수가 되고, 마음이 미혹하면 감로수도 독이 된다'는 원효의 깨달음이 새삼 이해되었다. 굴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마음의 크기가 중요한 거였구나.


계단이 끝나고 하늘정원 탐방로가 나왔다. 그런데 청운대를 지나쳤다. 사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정표가 저쪽으로 나 있는 것을 모르고 곧장 하늘정원 탐방로로 향했던 것이다.


실력 없는 산행대장의 또 하나의 실수였다. 사람들이 모여있고, 눈앞에 보이는 큰 정자를 하늘정원으로 착각했으니까. 그때까지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실수도 여행의 일부니까.

난 괜찮은데 나 때문에 그것을 못 본 우리 회원들은 어쩌누? 꼼꼼함을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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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개째 계단 즈음에 원효굴로 가는 잔도가 있었다.
IMG_6432.jpeg 원효굴 내부


군사시설물에 둘러싸인 비로봉을 올라 인증샷 하나 남기고, 멀리 석조여래약사상이 보이는 동봉(미타봉)으로 서둘러 향했다. 그동안 정상 노릇을 해온 봉우리답게 시원한 조망을 선사해 주었다.


배가 많이 고팠다. 살짝 산행로를 벋어나서 한적한 곳에서 서둘러 맛난 점심을 마치고 서봉으로 이어지는 오도재를 거쳐 수태골로 내려왔다.


국립공원이 되기 전 수태골은 대구 시민들의 피서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후 정비가 많이 된 듯했다. 수량은 다소 적었지만 시원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혹서의 고장 대구 같지가 않았다.


물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돌 틈새로 스며 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생각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그 흐름이 결국 바다에 이르러 구름이 되고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의 발걸음도 그런 것일까. 산에 올라 다시 내려오지만, 그 순환 속에서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남기는 것일까.


좋은 선택이었다. 좋은 이들과 한적하고 시원하게 팔공산을 산행했다.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나 또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함께 오르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완벽한 계획보다 유연한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팔공산에서 보낸 하루는 그렇게 기억 속 한 페이지에 고이 접혀 들어갔다. 언제 다시 펼쳐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소중한 한 페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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