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신선대삼거리-관음암-법주사 코스
모처럼 청명함이 아침의 문을 열었다. 투명한 햇살은 마른 공기를 타고 동네를 쓰다듬고 있었다. 주말마다 아쉬움의 눈물 같은 비가 온 산하를 적시던 한두 달의 시간을 지나, 오늘 속리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버스의 엔진 소리마저 오늘따라 경쾌한 노래처럼 들렸다.
회장님의 인사말 끝에 시 낭송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소개하겠다.
심순덕 시인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눈앞에 펼쳐 지나갔다. 그 시간의 조각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엄마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내 방식으로 어머니를 평가한 것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울컥했지만 감추어야 했다. 빠르게 끝낸 산행안내 뒤에도 어머니와 함께 생존투쟁을 했던 마산 어시장 골목길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북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문장대에서부터 흘러온 계곡물이 반갑게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등뼈를 쭉 펴고 심호흡으로 몸을 깨우는 준비운동을 마치고, 나는 선두에 섰다. 계곡의 물소리는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버스에 두고 내린 전화기. 오늘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속리산의 표정과 사람들의 멋진 포즈를 담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이것도 산이 준 작은 선물일지 모른다. 디지털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산과 마주하는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대로 향하는 길은 내가 공부해 온 그대로였다. 2시간 가까이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오르는 이 코스에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비로 씻긴 공기는 맑고 신선했으며, 안개는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산과 나무 사이를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떠 올렸던 어릴 적 기억도 숨바꼭질하듯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다.
문장대에 도착하니 넓은 휴식 공간이 산악인들을 맞았다. 오늘의 문장대는 '운장대'라는 본래의 이름처럼 구름의 바다를 품고 있었다. 아홉 봉을 활처럼 품은 속리산의 웅장한 품새가 운해의 물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다 감추기를 반복했다. 조금만 더 잘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깃들었지만, 산이 허락한 만큼만 볼 수 있는 것이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문장대 아래에서 펼쳐진 식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자연 속에서 먹는 밥상이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값지다는 것을 늘 느낀다. 식사 후, 우리는 길을 나누었다. 일부는 천왕봉을, 나머지는 신선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신선대삼거리에서 하산을 시작하면서 경업대와 관음암에서 바라본 풍경은 속리산이 왜 우리나라 명산 중 하나로 불리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하산길, 계곡물은 마치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흐르는 듯했고, 중간중간 크고 작은 소는 더운 여름날 알탕의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약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법주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시간의 혼란을 느꼈다. 학창 시절에 보았던 그 시멘트 불상은 온데간데없고, 금빛으로 번쩍이는 낯선 불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잊고 살아온 나 같은 방문객을 다소 냉랭하게 맞는 듯했다. 오직 팔상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 있었고, 나머지는 시간의 공간 속으로 날려간 듯했다. 차라리 기억 속의 법주사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산행을 마치며 문득 생각했다. 산은 변하지 않지만, 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오늘의 이 기억도 언젠가는 빛바랜 사진처럼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산행 후의 뒤풀이. 술잔에 담긴 것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문장대의 운해와 계곡물의 노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뒤섞인 오늘의 추억이었다. 함께 산을 오른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오늘의 아쉬움마저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