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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Oct 20. 2023

감귤과 감금되다

" TẾT QUÝT VÀ BÁNH CHƯNG _감귤을 치료한 바잉쯩

열두 살이던 큰 아들 녀석과 친구들 다섯 명이 아파트 관리소에 감금되었다. 경찰이 올 때까지 풀어 줄 수 없다고 누런 제복에 안장을 찬 구역 관리 소장이 날카롭게 각이 진 눈가의 주름살을 씰룩이며 어스름을 떨었다. 부모들이 박카스 한 박스와 과일 봉지를 들고 가 사과를 했다. 아이들이 잘 몰라서 그런 거니 한 번만 넓게 이해해 주길 부탁하고 사정했지만 그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목소리 톤을 점점 높였다.


구정이 다가오면 길가에 부어이(포멜로) 나무,  귤나무, 매화꽃나무가 즐비하다. 열매가 많이 맺힌 나무를 집 안에 들일수록 그 해의 복이 그만큼 많이 들어온다고 철썩같이 믿고 사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의 나라에서 우리 아들과 친구 무리가 지은 죄명은

설날을 맞아 정성스레 구비한 그 귀한 감귤나무의 ‘복’들을 딴 것!

한 두 개를 딴 것이 아니라 다섯 녀석이 신나게 잔뜩 따서는 아파트 바닥에 다 터뜨리며 그 귤로 던지기 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관리 소장의 화는 머리끝까지 날 수밖에. 베트남의 문화를 무시하고 장난질을 한 한국 아이들을 호되게 혼내 줄 것이라고 고집을 꺽지 않았고 아이들은 땀을 찔찔 흘리며 다섯 시간째 갇혀 있었다. 밤이 오고 오랜 시간의 이야기 끝에 결국 타협이 되고 풀려난 2007년 설 이브의 웃픈 해프닝이었다. 개구쟁이 나의 아들덕에 우리가 맞이한 첫 ‘Tết(뗏)‘ 베트남의 설명절은 호된 혼쭐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베트남의 구정 연휴 Têt(뗏)은 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달력상의 빨간 날로 따지자면 한국의 연휴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실제 뗏 명절은 앞 뒤로 두 달은 마비가 되는 시기이다.

한 달도 훨씬 전부터 뗏이 다가와 일을 할 수 없다고 하기에 어지간한 작업을 진행하기가 힘들다.

연휴가 끝나도 아직 고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필요한 일들을 제 때 할 수 없으니 적어도 명절 끝 한 달은 더 마음에 여유를 잔뜩 깔아나야만 뒷 목을 잡고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카페 직원들은 일 년에 한 번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두세 달 전부터 휴일 스케줄을 짜느라 여념이 없다. 열흘의 휴가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고향으로 내려갈까 나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한다. 달력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지치게 해서라도 휴일을 며칠이라도 더 챙기고 두둑한 보너스도 챙겨 가지만 연휴가 끝나면 돌아오지 않는 직원들도 꽤 있다. 뗏은 공공연한 이직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먹튀의 계절이다.


설 명절이면 시집에 가기 싫어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한국 여자들이 있다면 나는 뗏이 다가오면 감귤 나무도 쳐다보기 싫은 베트남의 한국여자였다. 귤나무의 노이로제와 붕 떠있는 직원들을 제자리로 되돌리려면 몇 달은 족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니 참으로 긴 이 나라의 설 명절 후유증들이 참 달갑지 않았다.



세월은 한 해 한 해 흐르고 정 많은 베트남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이런 나의 베트남 '뗏 증후군'을 서서히 회복시켜 준 치료제가 나타났다.


바나나 잎 향기를 가득 품은 초록빛깔 네모 꾸러미


쌀의 민족 한국인이 떡국을 끓여 한 살을 더 먹을 때

1700해리가 떨어진 곳의 또 다른 쌀의 민족 베트남인은

찹쌀밥 'Bánh chưng (바잉쯩)'을 쪄낸다.


초록 빛깔 쫀득한 찹쌀밥의 배를 가르면 그 안에는 노란 녹두와 후추향이 나는 보들보들 핑크빛 살코기가 삐져나온다. 한 입 베어 물면 바나나 잎 향이 입안에 사르르 퍼지고 더할 나위 없이 쫀득한 찹쌀밥 맛이 일품이다. 그 묘한 풍미에 중독이 되어 이젠 '바잉쯩'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오매불망 뗏을 기다리는 여자가 되었다.


올해는 베트남 친구가 언제나 우리 집을 들르려나 기다리고 있는 동안 사진을 보내온다.

커다란 검은 솥 아래 장작 위로 불을 일으켜 세운다. 가족의 일 년을 힘차게 일으켜 세울 불이다!



"지금 시골집에서 커다란 솥에 너에게 가져다 줄 바잉쯩을 찌는 중이야.

내일 아침 일찍 가져다줄게"라는 그 친구의 메시지에 내 잎은 주욱 찢어지고 있다.


억울한 뗏인줄 알았는데
끈끈한 뗏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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