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편 같은 내편
오늘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활기찬 날이다. 오랜만에 아는 여자 동생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 보다 컨디션도 좋고 날씨도 맑아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만나봤자 엄마나 가족만 보고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가족 아닌 사람들을 나가 어떻게 대했더라 가물 가물 해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연애 시절 소녀였던 나 자신이 점점 감성적에서 현실적으로 바뀌며 털털하고 목소리가 큰 k 아줌마가 되어 가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나 아들이 있는 집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고 달프고아줌마 다 됐네 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며 어떤 어둡고 슬픈 기분을 주게 되는데 이것저것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고르고 골라 들어간 예쁘고 감성 있는 밥집이나 카페에 가서 너무 좋다 오버를 떨고 먹기 전 사진부터 찍으며 sns 올려대다 각자 데일리룩을 찍으며 너 너무 이쁘다 가식을 떨고 괜한 것도 아닌 것에 공감해 주며 같이 화를 내주고 욕을 하다 뒤돌아서면 까먹고 이 것 저것 먼저 궁금해해 주며 끝없이 말을 걸어대는 여자 친구들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이 그립기도 하고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우와 벚꽃이 너무 예쁘네라고 말하는 감성적인 친구에게 이 날씨에 아직도 벚꽃이 있냐며 차갑게 말하는 현실형 인간이 되어버린 나였다. 공감보다 해결이 우선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지금이 막 불행하다거나 불편한 건 아닌데 남편과 수다를 떨다 보면 내가 생각한 반응이 아닌 무뚝뚝한 대답이나 그저 그런 해결법이 돌아오는 게 가끔 심심하기도 하고 서운해서 공감을 좀 더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여자 친구들을 만나 놀던 상황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 같다.
간만의 외출은 기대한 것과 달랐다. 난 오히려 기가 빨리는 느낌을 받아 도망치듯 집에 오고 말았다. 뭐랄까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풀던 나였는데 지금은 굳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도 못 느끼겠고 괜히 신경 쓰이고 불편해서 상대의 이야기에 대꾸나 웬만한 반응만 해주거나 먹는데 집중하다가 쥐어짜 내 상대에 대한 질문 한 마디씩 한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고역이었다. 너무 혼자 집에 있고 편한 가족만 보다 보니 인간을 대하는 법을 까먹은 건지 혼자가 익숙해진 것인지 이러다 내 인간관계를 망치고 친구도 없는 사람으로 한평생을 보내게 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출산을 하고 직장을 가서 사람들을 만나 눈치를 보며 대화를 하는 자리들이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아무렇지 않게 편안한 분위기로 수다를 떨 수 있을까 무섭기도 했다. 상상력도 풍부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아서 친구들 중 1등으로 조잘거리던 내가 지금은 상대가 먼저 말하길 기다렸고 나에게 질문하고 재밌는 이야기나 썰을 풀어달라고 하면 괜히 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척하며 말을 돌려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유도하고 질문하게 되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왜 남편이 집에 오면 말문이 트이고 입이 터지는지 퇴근하고 와서 씻고 피곤해 누워 폰을 보는 남편을 계속 두드려 나를 보게 하고 말을 걸어댄다. 쓸 모 없는 이야기까지도 다 별 거 아닌 무슨 말을 해도 재밌고 깊은 이야기는 더 재밌다. 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가끔 싸움이 되기도 해서 아직 어렵지만 여하튼 결혼 후에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해서 수다를 떨거나 남편이랑 밤낮으로 떠드는 게 제일 마음 편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 남자들은 가끔 혼자 멍 때리는 시간이 갖고 싶어 진다고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퇴근하고 와서 누워서 조용히 조금은 쉬고 싶겠지 그걸 알아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참고 옆에서 같이 폰을 하다가 한 마디씩 던져본다. 그런데 어떤 날은 막 미친 듯이 말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때는 별 건 아니었고 경제, 은행, 돈에 관한 유튜브를 보다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끝도 없이 궁금한 게 생겨서 진짜 이번이 마지막, 근데 진짜 마지막으로 하다가 뱅크런까지 갔다가 지쳐버린 남편이었다.
그냥 뭘 하다가 생긴 화나거나 웃기거나 슬픈 일들은 뭔가 모두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공감받고 공유해서 같이 울고 웃고 화내고 싶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그런 점들을 나에게 말해주고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 남자들은 원래가 힘든 걸 숨기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데 난 다 알고 싶다. 내 욕심이겠지
하다 못해 영화나 드라마보다 이혼숙려 캠프나 오은영 리포트 몰아보기를 더 많이 보는 것도 같이 화내고 욕을 하고 웃으며 수다 떠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도 남편도 사람인데 매일 미친 듯이 앉아서 몇 시간씩 대화하는 걸 원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침 출근 전 퇴근 후 저녁 짧은 시간이라도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누거나 간단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 불편함 없는 시간과 소소한 이야기들이 쌓이면 서로를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거 같고 좋달까?
신혼 때에는 맞춰감의 연속이고 알게 되어 놀라움의 반복인데 대화를 많이 하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루틴이나 스타일이나 대화형식 등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많이 싸워봐야 한다는 말도 들어 봤을 것이다. 많이 싸움으로서 앞으로의 싸움 예방이 어느 정도 되기 시작한다. 어떤 점을 더 조심해야 할지 상대가 고치기 기다리기보다 내가 바뀌자 마인드를 가지게 되며 합의점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웬만한 건 대화로 풀리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일은 정말중요하다 생각한다.
이혼 사유 1위를 찍을 만큼 많은 부부들이 소통 불가로 대화를 포기하고 상대를 기피하며 소통 단절 상태로 살아간다. 우리도 만만치 않게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지만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예로 들어 과거 이야기는 꺼내지 말기, 말하라고 했을 때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말에 살 붙이지 말기, 싸움이 끝나고 지난 뒤 다시 납득이 안 가도 다시 말을 꺼내 싸움 일으키지 않기, 인정하고 빠르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등의 룰을 정했는데 글로 적어서 그렇지 우리 둘이 에너지와 감정 소모를 각자 할 만큼 하고 속으로 겉으로 엉엉 울고 머리끝까지 화나서 이 짓 저 짓 별 짓 다하며 생쇼를 해서 이뤄낸 룰이다. 그럼에도 잘은 안되지만 서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걸 보니 대화로 정할 수 있는 규칙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게다기 이야기해서 끝까지 안 풀리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것도 깨달았다.
끝없이 키워지는 인내심과 알아줄지도 모르겠는 노력들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불쑥 찾아온다. 서로 너무 큰 노력을 해서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생각할지 몰라도 다시 잘 살아 보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직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밉게 상처 주고 최선을 다해 싸워서 남의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편하고 무엇보다 따듯하게 사랑을 주는 여전한 내편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