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죽어가는가
남편 입에서 너로 인해 내가 죽어간다는 말이 나왔다. 언젠가 듣게 될 말인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거 같다. 하루가 지날수록 지쳐서 굳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마찬가지로 가슴을 쥐어짜는 거 같이 속상하고 아팠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너 때문에 죽어간다고 말할 수 있었다. 힘들면 다 두고 떠나도 된다는 말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둘은 시체 같이 공허한 눈에 혈색 없는 피부색을 띠며 입만 뻥긋거렸고 내려놓은 지는 오래라 포기 상태에 이르러있는 데다 한계점은 이미 뛰어넘은 걸 서로가 알았다. 서로에게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켜켜이 상처는 쌓여갔다. 살짝 건들면 폭발해 버릴 사람처럼 예민하고 민감한 상태로 밝은 척 속내를 감추고 버텼다. 언젠가 이해하고 감내해 주겠지 하염없이 때를 기다리면서 많은 것들을 속에 담아 넘쳐흐를 때까지 이러다 깨지겠다 싶으면 간당 간당하게 밑 빠진 독으로 물을 퍼내며 한 번만 더 해보자 다짐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나중에 그게 최선이 아니었구나 깨닫는 순간이 왔을 때 후회하지 않게 미련 없이 노력했다. 잡은 손쉽게 놓지 않기 위해 상대가 되어 생각해보고 나랑은 다른 타인이라는 점을 곱씹어 보고 이해를 하기 위해서 귀도 막고 눈도 감아 봤다. 입 닫고 아무 말하지 말자 꼬아 듣지 말고 들리는 대로 믿자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자 수십 번을 되뇌면서 속이 문드러지게 삼켰다.
무언가 하나가 해결되면 끝날 거 같던 싸움은 지속되었다. 사실 화가 난 게 아니라 속상하고 슬픈 마음인 걸 매번 잘 안다. 그런데 이번 싸움에 우리는 슬픈 마음조차 소모할 여력이 없어 고개를 떨구고 오히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힘들게 하는 게 서로 나 때문인 거 같다고 자책하며 서로가 사라져 줘야 서로가 행복할 거라고 지친 눈동자를 바닥에 고정하고는 한 마디 뱉을 힘이 없어 창백한 표정으로 다 책임질 테니까 떠나도 된다고 말했다.
우린 네가 표현하는 사랑이 이런 건지 몰랐고 내가 표현하는 사랑이 잘 전달되었을 줄 알았다. 네가 하는 사과가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을 때 내 사과는 너의 상처를 녹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서툴렀던 것인데 서로의 방식이 너무 달라서 수십수만 번 오해하고 풀고 맞춰가고 바꿔가며 그 와중에 성장해가는 우리를 보며 기뻐하고 무디고 느려도 조금씩 고쳐 나가고 변해가는 서로를 보며 고마워했다. 그런데 노력의 결실이 고작 이 정도라니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지는 오래지만 보수 공사 없이 위태위태하게 버텨온 성벽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릴 거 같았다. 아니 사실 이미 무너진 상태인데 현실을 직시하고 똑바로 잔해들을 바라보기 무서워서 회피하고 부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버티고 노력해야 나아질까 질문에 답은 내려지지 않고 나침반 없이 사막에 던져진 사람처럼 마냥 초조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만 드는데 무너진 성벽까지 바라보며 감당할 자신이 있을 리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기는커녕 서로를 견뎌 낼 자신감이 점점 더 없어지는 거 같아서 속이 쓰렸다. 힘들게 쌓아 올렸는데 조금씩 금이 가는 걸 알면서 외면한 것도 모자라 발길질을 해 무너지라고 기원한 셈인 걸 아니까 무너진 그 성을 보면 감당 불가능한 감정이 들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 버릴 거 만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감정을 들게 하는 게 서로인 반면 억제하고 참게 하는 것도 서로였다.
일상 중 며칠 고요하고 평온하게 온전히 사랑을 주고받는 날이면 속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소원을 비는 아이처럼 매일이 오늘만 같아라 간절하고 순수해진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감에 안도하고 사소한 일에 행복함을 느끼면서 한 번 더 서로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힘들 거야 배려하며 잃지 않고 오래 함께하기 위해 할애하고 매시간을 뭘 하면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잘했다고 칭찬받을까 고심하고 내 곁에 있는 순간을 더 편하게 해 주고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온종일 고민하는데 서로 알면서도 삐딱한 시선과 뾰족한 말이 나온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정말 좋아해서 아프게 하고 싶지 않고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다치면 내가 다친 거처럼 아린 사람에게 이렇게나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게 모순적이고 내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죄책감이 들고 실망스러웠다.
누구보다 아껴주고 조심하며 보듬어 주어야 할 둘이 으르렁 거리면서 발톱을 드러내고 경계하며 추한 모습으로 감췄던 감정을 드러낼 때면 우린 사람 보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 같기도 했다.
몇 번의 화해와 새로운 시작의 반복은 기계를 재부팅하는 것과 묘한 가지의 에너지 소모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어딘가 자리 잡혀 회상되지만 목 끝까지 차오르는 일들을 잊은 듯 숨기고 과거를 다시 내뱉지 않아야 지금을 잘 넘길 수 있어서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갑자기 현재로 재부팅한 무언가 처럼 군다. 우리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게 더 길게 싸우지 않는 길이라서 과부하 돼서 폭발하기 전에 끄지 않으면 진짜 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