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생각보다 시작은 쉽다. 만나고 유대감을 쌓고 사랑을 하다 미래를 꿈꾸고 마침내 개인과 개인이 너와 나 우리가 되어 함께가 되기까지의 스타트를 끊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나라는 사람이 너라는 사람의 가족을 만나 우리에 조화롭게 섞이는 일을 진행하는 건 생각보다 많이 복잡하고 일이 많다. 나는 내 부모님과 그저 그런 가정을 가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비혼주의자로 사는 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자식에게도 나와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유롭게 살아왔다. 지금 시대에는 서른 초 중반이 넘어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면서 오히려 이십대라는 찬란한 나이에 결혼을 하는 이들에게 청춘을 버리는 짓이며 아깝기까지 하다고 수근 댈 정도로 결혼 적령기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고 나 또한 결혼에 대한 로망이나 관념 같은 건 꿈꿀 수 없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힘든 것처럼 나이는 어렸고 현실은 사는 게 기적일 정도로 나 하나 책임지기 힘든 일들을 수십 수천 번씩 반복해 겪으며 행복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울한 하루를 쌓아가며 추억도 재미도 없는 삶을 보내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 값이다.
처음 세상에 나와 부모님을 만나고 또 다른 진짜 세상에 나와 친구들과 직장 동료와 상사를 만나며 끝없이 만나고 배워가면서 살아가도록 구성되어 있는 이 세계 속에 튀지 않고 무난하게 녹아들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릴 적 받은 사랑으로 베풀 줄 아는 따듯한 사람과 다르게 나는 나 마저 사랑하는 법을 몰라 사랑을 줄지 모르는 인격으로 컸다. 심지어 사랑한다 보고 싶다 표현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굴다가 어색한 어둠 속에 나를 가둬두고 바보처럼 화를 내지도 거절도 하지 못했다. 입에는 미안하다는 말,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고 코로 머리끝까지 찬 숨을 내 쉬고 내뱉으면서 내가 봐도 간다 간당하게 남들이 보기에도 위태 위태하게 살아야 하니 죽지 못해 버텼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의 배신과 사기,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와 슬픔, 세상이 내게 준 굳이 겪지 않았다면 좋았을 시련들로 심장이 검게 물드는 거 같이 아픈데도 잠들기 전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일들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모든 게 나 때문이야 되뇌고 있었다. 지금 그 일들을 다시 겪으라 해도 치를 떨며 도망칠 정도로 당시에도 별 거 아니진 않았지만 그 일들을 지금이 아닌 그때 일으켜준 신에게 고마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고 힘들어했던 모습을 상기하면 불쌍하고 추하다는 생각까지 들지만 이십 대 초반을 학원에 가서 돈을 내고 경험을 사서 배움을 얻고 더 나은 중반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만하기도 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때 그런 어둠을 걷어준 사람을 만났다. 어색함을 버리고 표현을 할 줄 알게 될 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또 나 스스로를 내가 직접 일으키고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게 귀찮아하지 않고 곁에서 섬세히 알려주었다. 실제로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초 중학교 동창이었던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너무 값지고 소중한 걸 내게 가져다주고 알려주어서 그 어떤 비싼 물건을 받는 것보다 그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어있는 내 마음을 채워주고 색칠해 주어서 절대 안일하게 한 순간의 잘못이나 실수로 잃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하고는 했다. 매우 따듯했고 무심하지만 깊은 속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품 속에 보듬고 사랑해 주었다. 성숙하지 못한 나는 무서웠다. 맑고 깨끗하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그 아이에게 나라는 사람이 전염되어서 나처럼 될까 봐 죄책감까지 드는 날도 있었다. 내가 이유도 모르고 울면 나를 들쳐 앉고 눈물을 멈추고 웃을 때까지 장난을 치며 날 달래는 마음을 가진 아이가 진짜 나를 다 보여주면 기겁하고 전에 내가 만난 친구들처럼 또 운다고 손가락질하며 날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멀리 가버릴 거 같아서 보여줄 듯 말 듯 아슬한 경계에서 내 우울에 옮지 않게 노력했다. 내가 쉽게 포기하려 할 때 마저 그 아이는 자신의 그릇이 그 정도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고 그래서 넌 끝까지 해봤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떠났냐며 오히려 강하다 못해 멋질 정도의 믿음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난 그 아이를 등지고 점차 원래의 색으로 색칠되어 가던 심장을 다시 검게 태우며 타들어가는 고통에도 연락 한 통 다시 할 용기를 내지 못해 울부짖었다. 그때마저 솔직하지 못했던 나, 제일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건 사실 난데 미련하게 바보 같이 방구석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할 힘도 없이 지쳐 쓰러져 울고만 있었다. 그런 나에게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은 너 내게 기회를 준 거 같았다. 너 없는 짧은 사이에 망가질 만큼 망가져 엉망이 된 나를 보면서도 넌 또 한 번 내가 내지 못한 큰 용기를 내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방법과 멘트로 연락을 걸어 나를 너 앞으로 불러 내었고 미래를 보며 다시 만나 보자고 진심을 쏟아내며 나를 네 옆자리 내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었다. 얼마나 황홀할 만큼 기뻤는지 다시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헤어짐을 반복하는 여느 커플들과 다르게 우리는 함께 같은 미래를 바라보며 눈을 맞춰 걸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내게 와닿기 시작하고 이 아이라면 한평생 함께 해도 행복한 일만 있을 거만 같은 생각이 들어 자꾸만 더 먼 미래에 나와 이 아이의 모습을 대입해 보게 되었다. 죽어도 내 시나리오에 없을 줄 알았던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였나 보다. 운명이 우리를 이끌기 시작한 게
우리 부모님은 스물여섯에 3개월 연애 끝에 결혼을 해 스물일곱에 나를 낳았다. 난 이 아이와 안 지는 18년이지만 연애 기간으로 따지면 당시 6개월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일을 하다 몸이 이상해 임신 테스트기를 한 순간 두 줄이 나왔고 그 일은 양가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을 했고 책임감도 있었으니 스물여섯 내 나이에 청춘을 버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그저 이 아이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된 일이 꿈처럼 기쁘고 좋았다. 그런데 이미 결혼을 마음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학적 유산을 하게 되었고 어린 나이라는 인식 때문에 부모님은 그렇게 되었으면 어린 나이가 아까우니 더 즐기고 결혼을 미루라고 하셨다. 우리는 반대를 반대하며 결혼을 진행하기 위해 한 달간의 융단 폭격을 가해서 계획적으로 재 임신을 했다. 지금 보면 정말 사랑에 미친 철없는 남녀의 이야기다 싶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 아이 때문이 아니라도 난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씀을 올렸고 책임감 있게 그 말을 지켰다. 난 그전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연상만 만나왔다. 더 생각이 깊고 날 잘 보살피고 어른답게 행동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근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가 적든 많든 생각이 어린 사람은 그대로 어리고 철이 없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 왔다. 나 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오빠 같은 면을 가진 이 아이는 내 관념을 정말 깨부서 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쉽게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던 결혼 진행 과정은 끔찍한 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통스럽게 힘들고 죽고 싶게 슬펐다. 다른 환경의 가족이 모여 의견을 모으는 자리부터 뭐 하나 잘 풀리는 게 없어 싸움은 커지고 당사자인 우리도 이러다 파하겠다는 불안감만 커져갔다. 그래서 우리는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버릴 가능성이 컸고 우리의 함께를 지키고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나큰 마음을 먹고 숨을 가다듬고 구청에 갔고 일주일 만에 서류가 처리된 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혼인관계서를 발급받아 볼 때면 진짜 우리가 부부구나 새삼 깨달았다.
이젠 정말 사랑할 일만 남았겠지 이 과정 속에서 받은 상처들을 치유할 시간들로 가득하겠지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는 경계선 끝에 서서 언제 폭발해 버릴지 모르는 무언가 처럼 만나면 안 되는 물과 기름이나 n극과 s 같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상처를 입히고 소리를 질러대고 정이 떨어지는 말을 내뱉으며 꼴 보기 싫은 표정으로 화를 내고 싸웠다. 사랑할 시간에 서로 최선을 다해 원망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고 지쳐서 수십 수천 번을 그만하고 싶었다. 다시 잘해보자는 말만 몇 번 째인지 우리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화를 단절하고 필요한 말만 하면 싸우지라도 않으니까 동거하는 기계가 된 거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게 결혼인가 우리는 사랑을 진행 중인지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인 건지 알쏭달쏭해졌다. 그래서 나는 기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