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릿하는 전기 같은 것이 뒷골을 때렸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한다.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인생은 전환점을 맞기도 하나보다. 그 날 들었던 한 마디를 평생 기억할 것이다. 2010년 12월 12일, 오전 10시경, 4호선 오이도행 열차, 그 안에서 나는 멘토를 만났다.
중앙역에 가는 길이었다. 주말이면 웨딩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를 다녔는데, 그날은 안산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오전 11시까지는 식장에 도착해야 했다. 내가 사는 부평에서 적어도 9시에는 차를 타야 했지만, 전날 술을 많이 마셔 조금 늦게 출발한 상황이었다. 마음은 급했고 시간은 빨리 갔다.
당시 내 생활은 무척 불안정했다. 마음도 몸도 차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이었다. 7년 만의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이나 휴학을 하며 꿈을 좇아 다니던 시간들은 그저 방황에 지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과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이유 없이 불안했고 매 순간 초조했다. 영상 일을 하고 싶어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었지만 들어오는 일이 없어 다른 업체 아르바이트나 하러 다니는 상황이었다. 내세울 게 없어 여자 친구 부모님도 뵈러 가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결혼식을 촬영하러 안산까지 가야 하는 처지도 못마땅했다. 그때 나는 온갖 자기비하를 서슴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나와 다르게, 지하철은 잘만 달렸다. 나 역시 쭉 뻗은 레일 위를 거침없이 달리고 싶었다.
전날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잡고 또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자기 컨트롤 하나 못하는 녀석, 책임감 없는 놈.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잠시만 제게 주목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주목할 정신이 없어 고개를 푹 묻었다. 목소리는 자신이 무슨 장애인가를 가지고 있다 말하더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어 볼펜을 판다고 했다. 또 구걸하는구먼, 하며 나는 눈을 감았지만 승객이 얼마 없었던지라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볼펜은 검은색과 빨강, 두 가지 색이 나옵니다. 시중 문방구에서도 볼 수 있는 종류의 볼펜으로 보통 500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이 볼펜을 단 200원에 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볼펜은 문방구에서 파는 것보다 질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순간 호기심이 일어 고개를 들었다. 보통 시중과 같은 품질이라고 하지 않나? 질이 떨어진다고 하면 누가 그걸 살까? 멍청한 건지 솔직한 건지, 아니면 멍청해서 솔직한 건지 그 반대인지, 어디 뭐라고 말하나 한번 계속 들어볼 요량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는 3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왜소한 사내였는데, 얼굴 군데군데 하얀 곰보 같은 것이 피어있었다.
“그래도 이 볼펜이 잉크는 잘 나옵니다. 그건 확실히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잉크 똥이 좀 뭉쳐 나오긴 하지만 메모하거나 낙서를 하시거나 할 때 불편한 건 없으실 겁니다. 그냥 쓰다 버리면 되는 볼펜이라고 생각하시면 200원이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뻔뻔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일반적인 장사꾼들과는 조금 다른 그의 말에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더욱이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너무 정직할 정도로 또박또박해서 외워 말하는 티가 나긴 했지만 톤이 고르고 억양이 부드러웠다. 끝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볼펜을 팔면 한 자루 당 30원이 남습니다. 부탁하옵건대 필요하신 분께서는 이 볼펜을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00원에 팔 수도 있지만 저는 그 30원이 제 노동의 가치로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순간 얹힌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노동, 그리고 가치. 찌릿하는 전기 같은 것이 뒷골을 때렸다. 볼펜더미를 쥐고 차량 안을 도는 그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승객들에게 볼펜을 들이대며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손을 들어 구매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조용히 다가가 볼펜을 팔고 고개를 숙였다. 한 만원 어치쯤 볼펜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 가까이 왔을 때, 그를 향해 손짓했다. 만원을 내미는 순간 그럼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천 원어치만 달라고 말했고, 그는 내 말에 웃음 지으며, 그렇게까지 필요 없으시지 않나요?라고 물어왔다. 아차, 나는 무척 부끄러워져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단 한 자루만을 구입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닌데, 적선을 하려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일이고, 30원이면 충분한 노동의 가치인데, 그의 노동을 철저히 무시하고 말았다. 나는 다음칸으로 옮겨가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웃음이 떠올랐다. 분명, 여유로웠던 그, 아니 그분의 웃음.
그날, 그분의 말과 웃음과 얼굴은 내게 아직까지 또렷하다. 아마 사는 내내 그분을 기억할 것 같다. 아마 나는 방황했던 게 아니라 칭얼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갓 시작한 일이 잘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뿐인데, 나는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걸까? 스스로를 폄하하고 자신을 망가뜨리기만 했던 나의 노동은 과연 30원의 가치라도 있었을까? 그 날 그분을 만난 이후 난 많이 안정을 되찾았다.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야 말로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고, 나의 노동이 지금 충분한 가치를 받고 있음을 인정했다. 노동의 적당한 가치, 그건 정직한 땀의 가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0년 12월 12일, 오전 10시경, 4호선 오이도행 열차, 그 안에서 나는 멘토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