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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비 Oct 14. 2015

고맙다, 모든 지난 이들이여

그럴수록 나는 온 힘을 다해 안개를 뿜었다

한때는 안개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희뿌연 장막 속에 모습을 감추어 깊이 들어와야 실체를 가늠할 수 있도록.


그게 매력이라 생각했다.


한눈에 선명한 경치는 볼 것 얼마 없어 쉬 질릴 거라 여겼으니.

허나 안개를 헤치는 이들의 불안을 배려치 못했다.


한 치 앞 불투명한 시야는 위험했고

겨우 나아가 마주한 나의 윤곽은 초라했기에,

사람들은 중간에 길을 돌려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온 힘으로 안개를 뿜었다.


그건 있어 보이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포장하는 방법이었고,

확실한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법.

기어이 용감한 모험가 몇이

꽁꽁 싸 맨 나를 뚫고 들어와 길을 냈다.


이제 나는 골짜기 같은 사람이고 싶다.


초입은 작은 등성처럼 보이지만

들어갈수록 새로운 길을 자꾸 만나게 되는.

그리하여 웅장한 산맥과 다채로운 환경을 품고 있는.


안개는 걷혔고 나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는데 주저 없다.

매력은 감추는 것이 아닌 보여주는 용기에서 온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보여줄 세계를 끊임없이 가꾸고 확장시켜,

선명한 나의 골짜기로 들어온 이들이 영영 거기 머물고 싶도록.


용감한 모험가들,

기꺼이 못난 나를 감내하고

모난 길을 다져 준 감사한 연인들.


그이들이 생명을 준 덕에

나의 땅은 옥토가 되어

너그러이 사랑을 받아들일 쓸모를 갖추었다.


고맙다. 모든 지난 이들이여.


덕분에 이제 나는 지금의 사랑에 배운 것을 쏟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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