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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비 Feb 12. 2017

대신 말고 대안을 주세요

플레이 리스트를 온통 동요로 채웠다


 


플레이 리스트를 온통 동요로 채웠다


눈 뜨면 음악 먼저 튼다. 총각 때부터 버릇이다. 멍하니 앉아 세곡쯤 들어야 정신을 차렸다. 경쾌한 발걸음처럼 활기 샘솟는 템포의 음악들로 아침 플레이 리스트를 채우고는 했다. 선곡을 자주 바꾸진 않았다. 들으면 잠이 깨는 고전적 조건 형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에겐 개가 있었고 내겐 스피커가 있을 따름. 주로 듣는 몇몇 곡이 로테이션하며 나를 일으켰다. ‘Offspring’의 ‘ComeOut and Play’는 그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도입부를 듣고 있노라면 피리 소리에 반응하는 항아리 속 뱀처럼 이불 꽁꽁 똬리 튼 몸이 물결치며 절로 일으켜졌다. ‘JasonMraz’의 ‘You And I Both’도 단골손님이었다. 그 노래는 특히 어서 씻고 일터로 나가야 할 것 같은 진취성을 불러일으켰다.


요즘엔 ‘Lukas Graham’의 ‘Happy Home’이 괜찮게 들리던데 그걸 아침 노래로 쓸 기회가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침 플레이 리스트를 온통 동요로 채우게 된 탓이다. 덕분에 진짜 ‘해피 홈’ 에 사는 아들바보가 되었으니 아쉬움도 기꺼울만 하다.


이제 눈뜨면 멍할 새가 없다. 아직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후딱 잠이 깬다. 이 녀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은 ‘RATM’을 최고 볼륨으로 귓구멍에 들이 박은 것처럼 정신을 강렬히 깨운다. 듣고 싶은 노래가 많지만 동요를 튼다. 나지막한 동요 소리에 아이가 서서히 잠에서 깬다. 어느새 아이는 동요에 맞춰 손발을 흔든다. 앙증맞은 엉덩이를 씰룩댄다. 그 순간만큼은 ‘핑크퐁 동요 모음’이 ‘Carpenters’보다 감미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떤 동요는 좀 이상하다


동요는 대체로 발랄해서 아침 활기에 적합하다. 내 어릴 적에도 들었던 유명 동요부터 요즘 나오는 ‘타요 씽씽 극장’이나 ‘뽀로로와 노래해요’ , ’ 콩순이 율동’ 같은 것까지, 매일 리스트를 바꾸어가며 다양하게 들려준다. 점점 아이에게도 취향이 생기는지 특히 반응 좋은 동요가 있다. 그런 동요는 따로 리스트 업 한다. 한창 개구짐이 오를 낮 시간에 선호도 상위 동요만 주욱 골라 틀어주면 꽤 오래 춤 추며 땀을 쏙 뺀다.


반면, 절대 들려주지 않는 동요가 몇 곡 있다. 우선, ‘작은 동물원’인데 이건 좀 섬뜩하다. 실컷 동물 종류와 울음소리를 매칭해 노래하다가 갑자기 ‘따당 따당 사냥꾼’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아니, 거기 뭐 총 들고 사냥꾼이 난입해서 어쩌자는 건데? 나중에 아이가 말을 배우고 호기심이 증폭할 나이에 ‘아빠, 아빠! 따당 따당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응, 죽이는 거야.’라고 답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도저히 안 될 노릇이더라.


또, ‘착한 어린이’도 배제 대상이다. 특히 이 노래는 내 교육관에 완전히 위배된다.


 

‘착한 어린이는 다투지 않아요. 착한 어린이는 울지도 않아요. 착한 어린이는 장난치지 않아요. 누가 누가 뭐라 해도 하하하 웃지요.’


 

아이들 조종하는 주문도 아니고, 스테레오 타입으로 점철된 동요라고 본다. 아이들이 함께 부대끼다 보면 다툴 수 있다. 중요한 건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거다. 아프고 슬프면 울어야 한다. 아이들에겐 칭얼거릴 권리가 있다. 울면 착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억압이다. 아이가 장난치지 않는다면 어디가 안 좋은거다. 장난은 통제 대상이 아니라 지도 대상이다. 잘 장난치고 적당선을 넘지 않도록. 장난치다 친구와 다투고 그게 서러워 우는 게 아이들 일상인 것을. 어른들은 다툰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생각하고 깨우칠 수 있게 인내로서 보듬어야 한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다. 아이를 귀찮아하는 어른들이 있을 따름. 다투지 않고, 울지도 않고, 장난도 안 치는 어린이. 그건 그냥 어른들 편하자고 아이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꼴 아닌가? ‘착한 어린이’ 동요는 꼭 다그치는 명령처럼 들린다.


아이들의 개구짐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창 자라는 중이니 활동량 넘치겠고, 아직 경험 해 본 일이 거의 없으니까 마땅히 서툴다. 많이 움직이는데 서툴면 사고 치는 거고.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애들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온몸이 근질근질한데 대체 얼마나 얌전하라고?


한 술 더 떠서 ‘누가누가 뭐라해도 하하하 웃으라’니… 난 이게 자꾸 ‘가만히 있으라’ 처럼 들려서 소름이 다 돋는다.


같은 의미로 ‘울면 안 돼’도 내 아이에게 들려주지 않을 거고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학습지도 시킬 생각 없다.


 


답답해도 걔들이 뛰도록 두자


유아기에는 특히 전두엽이 빠르게 발달한다. 비약적이고 폭발적으로. 전두엽은 사고력과 창의성, 판단력과 감정을 조절하며 이는 아이 인성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아 교육론에서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빨리빨리 문화에 물든 대한민국 어른들은 아이 혼자 무얼 끝까지 하도록 좀체 내버려 두질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행동에 재미를 느끼는 시점이 있다. 보통 네 살 근처에 그런 성향을 보이는데 아이에 따라 시기 차이는 있다. 한창 그럴 때에는 어른들이 자기 대신 무얼 해주려고 하면 이 앙물고 거부한다. 이걸 어떻게든 짓눌러 어른들 뜻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애초에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면서.


젓가락질이 서툴러 밥 한 끼를 한 시간 동안 먹을 수도 있는 거다. 혼자 옷 입겠다고 삼십 분을 낑낑댈 수도 있다. 신발끈을 묶겠다고 현관에 앉아서 흙 묻은 운동화를 한없이 조물딱 거리기도 한다. 빨리 먹고 상 치워야 한다며, 문화센터 시간 늦었는데 뭉그적거리고 고집부린다며, 더러운 신발 바닥을 왜 만지냐며, 아이 대신 후다닥 그걸 다 해주면 아이는 점차 의존적이 된다. 나중엔 저 혼자 할만한 나이를 먹어서까지 부모가 해주지 않는다며 자지러질지도 모른다.


아이를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건 서툴고 못하더라도 지켜 보아주는 인내심에서 비롯된다. 당장의 조급함이 나중에 아이를 망치게 될 수도 있다. 많이 어린 나이에 아무래도 해내기 힘든 일을 욕심 낸다면 못하게 하는 대신 조금 쉬운 대안을 제시해주자.


대신 말고 대안.


연습용 젓가락으로 능숙해질 때까지 반복하게 돕고, 입기 수월하도록 단추가 적고 품이 넉넉한 옷을 꺼내 주고, 와이어로 조였다 풀 수 있는 운동화를 사주는 식으로. 발만 쏙 넣으면 되는 슬립온 형태의 신발처럼 너무 쉬운 과제는 흥미를 잃게 할 수 있으니 난이도 조절에 신경 쓰면서. 단추 끼우기는 쉽지 않지만 똑딱이나 지퍼는 좀 할만하잖은가? 그런 작은 성취들은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스스로 해내다 보면 자연스레 책임감까지 강해진다.


아이를 답답해해서는 안 된다. 바른 어린이가 되길 바란다면 어떤 행동에 대해 그건 나쁘다고 단정 짓기보다 대안을 주어야 한다. 다투는 대신 말로 심정을 나눌 수 있도록, 한 껏 울고 나서 자기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어른들이 먼저 아이에게 장난을 걸어 함께 놀면서 장난의 허용범위를 자연스레 인지할 수 있도록.


시간이 걸리고 속이 좀 터지더라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자. 넘치는 기회를 주자. 사고 치는 걸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아이들 사고방식을 통제하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아이들은 건강한 것 하나로 충분히 기특하다. 열 펄펄 끓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병원을 향해 달려 본 부모라면 안다. 고 개구쟁이 녀석이 아파서 얌전히 누워있는 꼴 보느니 따라다니며 뒤치닥거리 하는 게 훨씬 맘 편하다는 사실을.


난 크리스마스에 앞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카톡을 보낼 거다. 우리 아가는 솔직히 엄청 울었대요. 근데 만날 울어도 착한 아이니까 선물 꼭 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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