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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비 Nov 09. 2017

사실 되게 천재인 형

유스전략본부장 되신 지느님을 찬양하며


개인적으로 박지성에 대한 평가 중 가장 촌철살인이 아닐까 싶었던 인터넷 댓글이 있다.

‘사실 천재인데 외모 때문에 노력형으로 오해받는 형.’

나는 박지성의 플레이를 투박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기술이 부족하다거나 스피드가 뒤처진다는 느낌도 없었다. 아니, 내 느낌이나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헌신적 태도, 굉장한 활동력과 폭, 끈질김, 박지성을 대표하는 수식어들은 마치 그가 오로지 성실함만으로 맨유의 주축이 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박지성은 사실 기술 수준이 높고 축구 센스가 뛰어난 월드클래스 반열 선수였다.

한국시간 2017년 6월 4일, 맨유 08 레전드에 당당히 선발로 이름을 올리며 오랜만에 올드 트래포드를 누빈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며 다시 한번 감격에 젖어 이 글을 쓴다. (사실 은퇴 후 매 년 레전드 매치나 자선경기에 초청되는 그이기에 새삼 스럴 것 없긴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박지성을 말도 못 하게 존경한다. 모든 축구선수 통틀어, 그 밖 모든 스포츠 선수 중에, 그 넘어 현재 전 인류와 역사상 그 어떤 위인보다도. 축구 선수였던 그는 내게 축구 밖 인생에 대해 귀감이 된 사람이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  영감을 준 위인이다. 이미 박지성의 맹목적 지지자임을 밝힌 이상 아래 내용은 객관성을 상당 부분 잃겠지만, 거짓이나 과장은 하나도 없는 글이 될 것을 맹세한다. 진짜다.

말했듯 박지성은 천재다. 수비형 윙어라는 역할을 창조했을 만큼 수비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누군가를 막아서는 모습만 많이 회자되는데 사실 공격력도 발군이었다. 은근히 개인기도 갖추고 있었다. 방향 전환 및 템포 조절로 수비도 곧잘 벗겨냈다. 영리한 침투와 날카로운 패스도 심심찮게 선보였다. 오프 더 볼 움직임은 잘 알려졌듯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럼, 박지성이 왜 천재인지 좀 더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자. 다만, 여기에서 나는 그의 연대기를 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요 활약상과 커리어 부분을 세세히 짚지는 않을 거다. 그런 글은 이미 많이 있었고 유튜브에서 스페셜 동영상만 찾아봐도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활동량의 진실]


익히 활동량이 뛰어난 선수로 알려진 박지성이지만, 실제로 경기 후 매번 전체 활동량 1위를 기록했던 것은 아니다. 마이클 캐릭이나 대런 플래처 같은 선수들이 박지성보다 높은 활동량을 가져간 경기도 많다. 사실, 단순히 많이 뛰는 건 별로 대단한 장점이 못 된다. 그저 열심히, 악착같이 한다고 수준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활동량으로 유명한 은골로 캉테를 보면 단순 뛴 거리 계산으로 최정상급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적재적소에 존재하고 차단과 태클에 능하며 영리한 탈압박 후 공격을 전개시킬 수 있는 패스나 돌파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갖추었을 때 활동량이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높은 활동량을 가져가면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효율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박지성 전성기 때 자주 팀 내 1위를 가져간 수치는 스프린트다. 단순 활동량에는 자신이 볼에 관여하지 않는 지역에서 걷는 거리까지 포함되는데 반해, 스프린트는 순간적으로 달리는 거리를 계산한다. 거의 볼을 소유하거나 탈취할 때, 혹은 수비교란을 위해 이런 움직임을 많이 가져간다. 박지성은 적게 걷고 많이 뛰는 선수였다. 전력질주 거리로는 팀 내 1위를 심심찮게 기록했다. 즉, 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순간이 많다는 의미이고 영리하게 뛰는 선수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거의 팀 이득으로 전환되었다. 볼을 빼앗기면 다시 달려가서 어떻게든 되찾아오는 플레이로 유명하기도 했다.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활동량으로 커버하는 악바리가 아니었단 거다. 필요한 순간에 효율적으로 움직였고, 활동량을 결과로 전환시키는 선수였다. 센스로 축구하는 타입에 가까웠다.



  [공격력과 마무리 능력]


선수들에겐 저마다의 장점이 있다. 모든 부분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만 제대로 해도 무기가 된다. 그런데 미드필더는 하나 이상을 잘 해야 한다. 수비와 공격 사이에서 조율하기 때문이다. 만일, 컷팅이 뛰어나지만 탈압박이 안된다거나, 탈압박이 수준급인데 전개를 못 시킨다면 반쪽짜리 선수로 전락하게 된다. 공격 참여가 활발해도 마무리가 안 된다거나, 수비 기여도가 낮다면 팀에 해가 될 수 있다.

박지성이 큰 경기에 강하고 빅클럽 킬러로 명성을 떨치게 된 건 그의 날카로운 공격능력 덕분이다. 화려했던 맨유에서의 7년 동안 대중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았었기에, 수비적 능력이 뛰어난 모습으로 기억돼서 그렇지 원래 공격력이 좋아서 러브콜을 받은 선수였다. 교토 퍼플상가 시절 팀의 에이스로 군림하며 아인트호벤 이적 전 시즌에 팀에 우승을 선물했고, 아인트호벤 이적 후 적응 문제로 1년여 암울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보란 듯 적응하여 팀의 부흥을 이끌었다.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골을 넣었던 2005년,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에 들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50인 후보에까지 포함되었다. 호나우지뉴, 세브첸코 다음 순위로 유에파 올해 공격수 3위에 선정되었으며 네드베드 바로 아래인 올해의 왼쪽 미드필더 2위를 기록했다. 명실상부 유럽 탑급 공격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단순히 부지런하고 근성 있는 선수라서 박지성을 영입한 것이 아니다. 수준 높은 공격능력에 더해 헌신적 태도까지 갖추었기에 서둘러 그를 팀으로 데리고 왔다. 조제 무리뉴 역시 박지성을 영입하고 싶어 했다는 비하인드는 유명하다. 그 외에도 박지성에 대한 세계 축구인들의 찬사는 수두룩하지만 이것도 여기에 일일이 옮겨 적지는 않겠다. 웹에 검색하면 이미 잘 정리해둔 자료가 넘쳐난다. 아, 긱스의 한 마디 정도는 언급해볼까? 그냥 이 말에 박지성에 대한 모든 평가가 담겨있다 해도 좋겠다.

‘그와 언제나 같은 팀이고 싶다.’

어쨌든 박지성은 발군의 공격력을 장착하고 있었고 확실한 마무리까지 가능했기에, 큰 경기에서 기회가 왔을 때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만일, 박지성이 정말 수비만 잘 하는 선수였다면 그렇게 자주 순도 높은 골을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체 골의 수는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 골들 중 두고두고 회자될 골이 많은 이유는 그가 공격력이 필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맘먹고 달려들면 확실한 임팩트를 보일만큼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박지성의 전성기 맨유 공격진 스쿼드는 어마어마했다. 만개하기 시작한 호날두와 물오른 루니와 테베즈, 노련한 긱스와 스콜스. 굳이 박지성이 공격에 사활을 걸지 않아도 충분한 구성이었다. 그들 모두가 박지성보다 파괴적인 공격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박지성의 위상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 누구도 박지성의 수비적 공헌을 대신할 순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박지성은 그들 중 누군가가 빠졌을 때, 그들의 역할을 부족함 없이 대신할 수 있었다. 호날두와 루니, 테베즈가 주요 삼각편대를 이루던 시절 박지성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평소에는 그들을 받쳐주며 역습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공격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수행 불가능한 역할이었다. 충분히 선보일 수 있는 영웅 기질을 내려놓고 궂은일을 도맡으며 팀의 전성기에 중요한 톱니로 기능했던 것이다.


[오프 더 볼만큼 뛰어난 온 더 볼]


본래 측면이 주 포지션이지만 중앙에서도 많이 뛰었다. 맘만 먹으면 수비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을 거란 평가도 많았다. 박지성이 중앙에서 뛸 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거나 약간 처진 중앙 미드필더였다. 국가대표에서는 공격형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기도 했다. 공이 없을 때 움직임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로 유명했던 박지성인데, 사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 움직임도 굉장히 좋다. 일단, 경기 템포를 조절할 줄 안다. 무리해서 돌파하거나 굳이 전진에 목매지 않는다. 대신, 확실한 공간이 보이면 지체 없이 공간으로 패스를 보낸다. 좁은 지역에서 오밀조밀한 패스 능력도 준수했고 침투하는 공격수가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도록 속도에 맞추어 전진 패스를 뿌리는 능력도 괜찮았다. 경기에 꼭 한두 개 이상 놀라운 패스를 넣어주었다.

공을 빼앗기면 바로 쫒아가 되찾아오는 모습은 박지성의 트레이드마크였는데, 뺏는 것에 그쳤다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거다. 그는 되찾은 공을 재빨리 전방으로 전달하거나, 안전지역에 있는 동료에게 보냈다. 피지컬이나 화려한 개인기로 탈압박을 해 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신속한 패스로 압박을 벗어났고, 그 패스는 정확도가 높았다.

몸이 가벼운 날에는 울버햄튼전에서처럼 수비 서넛 벗겨내며 골을 넣기도 했고, 돌파 시에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향 전환을 통해 툭툭 치고 나가며 순식간에 상대 진형으로 볼을 운반한 적도 많았다. 공을 지닌 채 수비를 둘셋 앞에 세워두고 로빙 패스로 침투하는 동료에게 연결한다거나, 달려오는 수비 경로를 예측하여 공간으로 멀리 툭 쳐놓고 빙글 돌아 볼을 다시 소유한 뒤 계속 돌파를 이어가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특히, 아시아권 나라와 국가대항전을 치를 때면 박지성이 얼마나 개인 능력 뛰어난 선수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실력을 보여주며 높은 돌파 성공력을 자랑했다. 산책 세리모니로 우리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일본전에서도 박지성은 수비 다섯을 근처에 두고 빠른 템포의 슈팅으로 골문을 열어젖혔다. 수비가 밀집되기 전 공간으로 파고들어 시원시원하게 뚫고 나가는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신체 밸런스]


박지성은 자주 넘어졌는데, 또 자주 일어섰다. 투지와 정신력의 표본으로 많이 예 드는 선수인데 이는 신체 밸런스가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기억을 떠올려보자. 막상 벌떡 일어나기 쉽지 않다. 넘어지자마자 일어서서 먼저 뛰기 시작한 상대를 따라잡아 공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몸의 무게중심이 제대로 잡혀있어야 함은 물론 순간속도도 빨라야한다. 그래서 박지성은 넘어지는 것조차 어떨 땐 그저 전진하는 움직임의 한 동작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또, 박지성은 넘어질 듯 안 넘어졌다. 피지컬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 큰 선수들과 몸싸움을 해도 맥없이 튕겨나가는 일이 적었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무게중심을 낮게 가져가며 결국 버티고 뚫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박지성은 몸싸움할 때 상체를 많이 숙인 채 무게중심을 낮추어 달리곤 했다. 부러지지 않고 휘는 갈대처럼 유연하고 민첩했다. 결국 넘어지게 되면 이런 자세는 고꾸라질때 상대에게 밀쳐진 느낌을 주었고, 덕분에 카드 유도 확률이 높았다.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마크할 때에는 역동작에 걸려도 금방 몸을 틀어 방향을 전환해 앞을 가로막았다. 08년도 AS로마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 라인을 나가는 볼을 헤딩으로 따내며 극적으로 루니의 골을 어시스트한 명장면은, 근성도 근성이지만 발군의 신체 밸런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심장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그 무엇]


박지성의 성공 스토리는 잘 알려진 대로 한 편의 극적인 영화 같다. 왜소한 체격, 평발이라는 악조건, 받아주는 대학팀이 없어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진학. 허정무가 발굴해 히딩크가 진가를 알아보지 전까지 눈에 띄지 않아 특별한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 하지만 이런 스토리를 몰라도, 박지성의 경기를 보면 누구라도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선발이던 벤치 시작이던, 풀타임을 뛰던 교체던 박지성이 일단 그라운드에 올라 플레이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수 아래 팀을 상대해도 얕잡아보지 않고 온 힘을 다했으며, 한 수 위로 평가받는 상대를 두고도 주눅 들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내가 박지성을 존경하는 이유는 어렵게 성공해서도 아니고, 감추어진 천재성이나 그 이상의 노력도 아니다. 리그를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서고, 많은 것을 이룬 다음 시즌에도 마치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경기가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경기인 듯, 한 경기 뛰고 죽어도 괜찮을 사람처럼 움직이는, 악착같다 못해 때로 처절하기까지 한 간절함을 존경했다. 권위와 오만은 조금도 없지만 아우라는 압도적이었다. 박지성이 골을 넣는 날이면 나는 좋은걸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리버풀 전에서 헤딩골을 넣었을 때, 챔피언스리그에서 드로그바의 골에 찬물을 끼얹는 결승골을 넣었을 때, 그때에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너무 좋아서.

박지성은 언뜻 차분하고 얌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불같은 사람이자 독기와 오기로 뭉친 선수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대신 잔디 위에서 모든 열을 다 발산했다. 19살 박지성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이 기억난다.

‘쓰러질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그 이후 내가 본 박지성은 언제나 쓰러지자마자 벌떡 일어서 전력으로 질주하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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