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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비맘 Aug 07. 2020

네 이름은 ‘피비’야, 피. 비!

Phoebe from Friends




  6평 남짓한 내 원룸 방에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토끼를 꺼내 내려놓았다. 1주일 간은 어두운 곳에 두고 건드리지 말라던 할머니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종이박스를 잘라서 급하게 바구니 위를 가려 동굴처럼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자꾸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러다 괜히 스트레스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이 토끼를 내려 두고 친구와 함께 토끼 카페에서 부랴부랴 토끼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알팔파라는 풀을 말려 압축 시켜 놓은 것

아기토끼의 주식은 ‘알팔파’라는 풀인데 아기여서 딱딱한 줄기보다는 잎을 선호해서 잎만 판매를 하는 사이트도 있다는 정보, 그러나 토끼는 평생 이가 자라기 때문에 적절한 건초를 통해서 토끼의 이가 자라는 걸 막아줘야 해서 알팔파라는 풀도 잎만 먹더라도 줄기를 먹여야만 한다는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알팔파?’ ‘알파카는 알아도 알파파는 뭐야.’





알팔파 .. 발음도 어려웠다.
우리가 사온것 들 중 알팔파라 하는게 있는지 대형마트에서 직원이 추천해서 사온  토끼 필수용품들을 뒤적였다.  다행스럽게 ‘알팔파’가 보였다. 얼마큼 줘야 하는지 몰라 아주 작은 그릇에 알팔파를 조심스럽게 한 줌 쥐어 놓아 주었다.





이번에도 이 작은 생명체는 우리의 기대를 웃돌았다.
잎사귀만 주워 먹겠지 하는 생각에 잎사귀를 열심히 알팔파 봉지에서 찾아 모으고 있었는데 턱 하니 알팔파 줄기 하나를 탁 입에 물더니 우적우적 알팔파를 열심히 씹어 먹기 시작했다.
‘겁이 많아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라던 할머니의 말 역시 맞지 않았다.
이 아이는 4족 보행따위는 모른다는 듯 두발로 서서 미어캣처럼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다.


알팔파 줄기 맛있는데??




오호라, 여기가 바로 내가 앞으로 살 곳인 건가! 얼마나 좋은지 내가 검사해 봐야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저 새로운 집이 신기한 듯 보였다. 그 작은 토끼의 눈에는 두려움, 슬픔, 무서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자기 몸집보다 큰 바구니를 탈출해서 우리에게 뽈뽈뽈 다가왔다. 오히려 이런 토끼의 행동에 당황한 우리가 요리조리 이 생명체를 피했다. 분명 사람이 자꾸 만지면 안 된댔는데.... 스트레스 받는댔는데... 너무 귀엽다고 만지고 하면 금방 죽는다고 일주일 동안은 손대지 말라고 하셨는데...

넌 도대체 뭐니…?


그런데 너무나 귀여웠다. 그저 다가오는 저 솜뭉치를 피하기만 하기엔 너무 귀여웠다. 우리가 다가간게 아니라 스스로 다가 온거니 스트레스를 안 받을거라는 합리화를 마친뒤 쓰다듬도 해보고 침대 위에도 올려놔 보았다. 추운 날이었으니 극세사 이불이 깔린 이불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턱- 하니 두 손을 내 손위에 올렸다




태어나고 처음 올라온 곳이라 그런지 또다시 공원에서 처럼 포복자세를 하면서도 침대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사료를 꺼내서 내 손바닥 위에 올려 손바닥을 펴보였더니 냉큼 다가와서 야무지게 본인의 두 손을 내 손위에 턱 올리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포복자세는 하지만 탐색은 포기하지 않겠토!




보통 토끼가 아니구나, 너?
너는.. 피비다!! 피비!!



당시 나는 미국드라마 ‘프렌즈’를 다시금 시청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아 나의 최애였고 지금도 최애다.
여자 셋, 남자 셋 6명의 남녀가 삶을 살면서 겪게 되는 사랑,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어쩌면 흔한 이야기였지만 영어공부에 좋은 미드라고 알려져 꽤 많은 사람들이 봤을 것이다.
나는 아나운서가 되기 전 소위 취준생 시절에는 생계유지를 위해서 영어학원강사와 영어 과외일을 하고 있어서 영어실력을 위해서 프렌즈를 다시금 시청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영어실력 유지를 위해서 보기 시작한 건 맞지만 정말 수 년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프로그램이라 집에 들어오면 늘 적막함을 없애기 위해서 휴대폰으로 프렌즈를 틀어놓았었다. 히어링(hearing)이라고 하는데, 그저 틀어만 놔도 이제 어떤 장면인지 그려질 정도로 자주 본 미드였다.  


왼쪽 하늘색 옷을 입은 배우의 극중 캐릭터가 ‘피비’다



넌 이제부터 ‘피비’야. Phoebe.



그런 프렌즈의 여섯 캐릭터 중에 피비라는 캐릭터를 따서 피비의 이름을 지었다. 피비는 처음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나는 모니카를 좋아했다. 극 중의 모니카와 나는 굉장히 닮아있었다. 그녀의 성격 말이다. 예민하고 모든 것을 관장하지만 허술하고 그러면서 철저하고 싶어 하고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지만 인정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는 모니카.
그녀와 정반대 되는 캐릭터가 바로 피비였다.

규율과 규칙은 없고 자유분방하고 말은 뇌를 거치지 않은 듯  그저 내뱉지만 밉지 않고 보통의 일반인들이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친구. 너무나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특유의 사이코틱한 감성을 지닌 피비. 이 특이하고 4차원에 평범함과는 거리가 매우 먼 피비와 이 토끼는 매우 닮아 보였다. 어쩌면 내가 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던 마음을 피비에게 투영시켜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제로 피비를 키우는 내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 토끼는 제가 알던 토끼의 상식을 많이 벗어나네요’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생명을 데려왔던 나와 친구는 그나마 친구의 발 빠른 (?) 아니 손 빠른 서칭력 덕분에 토끼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도 쌓을 수 있었다. 운 좋게 얼마 전 토끼를 떠나보낸 분에게서 큰 케이지를 배송료 12000원만 내고 무료 나눔을 받게 되었다. 토끼 카페는 유용한 정보와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토끼들이 어떻게 크고 있는지를 보면서 어떻게 이 작은 아이를 키우고 싶은지를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일주일도 안 되어 무용지물이 되었던 하늘색 바구니



초중고 시절 내가 살던 고향에서 늘 평범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스스로 특별한 줄 알던 나는, 아나운서라는 것을 시작하고 늘 좌절하고 풀 죽어 있었다.
잘난 줄 알았던 내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사실들은 매일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고 나는 사실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목표의식 없이 표류하는 배처럼 나는 그저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내 삶에 내 손바닥만 한 이 작은 생명이 들어와 ‘생기’라는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6평 남짓한 이 좁은 원룸에서 이 작은 토끼가 뽈뽈뽈... 토랑토랑 걸어 다닐 때마다.. 저 작은 발로 열심히 열심히 6평짜리의 방이 마치 아메리카 신대륙인 냥 탐험하는 저 아기 토끼를 보면서 어딘지 모르게 내 삶도 분주해지고 살아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녕, 피비야 만나서 반가워 ...!


피비와의 동거의 시작이 어쩐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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