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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과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사이

by 진순희


예정된 책은 오르한 파묵이었다. 펼쳐든 책은 박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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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 수업할 자료를 찾기 위해 책장을 훑었다. 다음 주 강의에 맞춰 미리 준비해두었던 텍스트를 꺼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손끝이 멈춘 곳은 예상 밖의 위치였다. 책장 한 켠, 반쯤 삐져나온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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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을 인상 깊게 읽은 뒤, 밤늦은 시간 충동적으로 주문했던 책이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읽어야지' 하고 미뤄두었던 책. 그날따라 유독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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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페이지만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손에 들어온 책의 질감을 확인하듯 무심히 넘긴 첫 장, 그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출근보다 싫은 것은 세상에 없다.” 단숨에 웃음이 터졌다. 너무 현실 같아서, 너무 내 얘기 같아서. 그러고는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을 읽는 사이, 나는 어느새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책상 앞에 등을 꼿꼿이 세워, 그렇게 두 시간을 쏟아부어 완독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월요일 독서모임에서 올릴 책은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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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에 적힌 이름, 수업 준비를 위해 형광펜과 메모지를 꺼내며 공들여 읽고 있던 바로 그 책. 파묵의 문장은 늘 무게가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구조와 상징, 단선적이지 않은 서사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 줄 한 줄 따라가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품이었다. 감정보다 지성이 먼저 작동해야 하는 글. 그 문장을 꿰뚫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진도는 여전히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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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의 문장을 여전히 사랑한다. 그의 작품은 논문을 찾아가며 읽어내야 할 정도로 공부해야 하지만 기꺼이 감수한다. 그는 문장으로 인생 전체를 설계하는 작가다. 매 문장은 치밀하고, 구조는 단단하며, 그의 작품 세계는 깊고 넓다. 그래서 파묵을 읽을 때마다 삶을 하나의 서사로 바라보는 감각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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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박상영의 글은 다르다. 오늘의 감정과 현실을 새벽마다 꾹꾹 눌러 담는다.

그의 문장에는 얼얼한 매운 국물 같은 생생함이 배어 있다.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문장.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날 밤의 나에겐, 파묵보다 박상영이 필요했을 뿐이다.


박상영은 자신을 나태하고 게으르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회사에 다니며 소설을 쓸 때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근처 카페에 앉아 원고를 다듬었다. 그렇게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새벽을 지키며 글을 썼고, 결국 단단한 문장으로 소설책을 펴냈다.


파묵이 거대한 구조물을 설계하듯 글을 쓴다면, 박상영은 오늘의 감정과 현실을 정직하게 기록해낸다. 하나는 머리로 감당해야 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읽히는 글이다.


박상영의 글에 폭풍 이입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밤 11시, 때로는 자정이 넘어서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온종일 말을 쏟아낸 뒤 밀려오는 건 허기였다.


“오늘은 꼭 야식 안 하고 자야지.” 매번 되뇌면서도 와인에 쌀국수를 먹으며 넷플릭스를 시청한다. 매번 후회와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데, 박상영의 글에는 나와도 너무나 똑같은 상황이 연출돼 있었다. 크레바스처럼 책 속으로 툭 떨어져내려갔다. 완전 무장해제가 되어 그의 글로 빨려 들어갔다.


“배달 앱을 몇 번이나 지웠다가 새벽마다 다시 깔곤 했던…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 문장을 읽으며 웃었고, 동시에 울컥했다. 한 문장 안에 자기혐오와 생존의 아이러니가 겹쳐져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내 안의 무수한 밤들과 마주했다. 실패의 밤, 무너짐의 밤, 그래도 살아내는 밤들.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에는 우리가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그러나 차마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다이어트와 폭식 사이를 오가며 무너진 자존감,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 자기관리가 기본값이 된 사회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게으르다고 낙인찍히는 공기. 그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묵은 감정들을 꺼내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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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하는 책은 머리로 고른다. 계획에 따라, 일정에 따라, 추천에 따라. 하지만 정말 나를 움직이는 책은 마음이 고른다. 우연히 마주친 한 문장이, 내면의 허기를 건드리고, 흘러가던 방향을 살짝 틀어버릴 때. 내게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가 그런 책이었다.


월요일 독서모임에서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제가 『새로운 인생』을 다 못 읽은 건, 그보다 더 시급한 ‘오늘 밤’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계획한 독서는 실패했지만, 우연히 펼쳐 든 그 책은 제 감정을 깊이 흔들었습니다.”


파묵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의 소설 『새로운 인생』도 이렇게 시작하니까.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 역시 오늘, 책 한 권으로 하루가 바뀌었다. 책을 덮고 난 뒤, 문득 ‘글쓰기’에 대한 오래된 갈망이 되살아났다. 박상영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문지문화원의 소설창작아카데미에 등록해 소설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조용히 마음을 먹었다. 막연히 언젠가 쓰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것을, 이번엔 조금 다르게 실현해 보고 싶어졌다.


읽어야 했던 책이 아니라, 읽히는 책이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방향을 바꾸게 했다. 지금은 그 결심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저자 델리아 오언스도

칠십에 책을 쓰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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