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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Apr 26. 2020

스키너, 그 태도의 말들

나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굶는 게 답이에요.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들은 말이다.

몇 년 전 고3 쌍둥이 여학생들을 가르칠 때였다. 언니인 은지는 체대를 준비하고 있었고 동생 은민이는 미대를 지망하고 있었다. 쌍둥이인데도 이 둘은 너무나 달랐다. 외모도 다른 데다 성격까지 판이했다. 은지는 말수가 적은 데 살집이 제법 있었다. 그에 비해 동생 은민이는 사근사근하니 호리호리했다. 게다가 종달새처럼 말하기를 좋아했다.


학원 강사다 보니 수업이 밤늦게까지 있었다. 상황이 그러한지라 몇십 년 동안 야식의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지금도 여전하긴 하다. 40킬로이던 몸이 이제 60킬로를 훌쩍 넘어 텔레토비처럼 변했다. 주변에 날씬한 학부모들에 둘러싸여 있어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고2 때까지만 해도 통통하던 은지가 체대 준비하면서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졌다. 옆구리 살까지 홀쭉해져 있었다. 다이어트에 특별한 비법이나 얻을까 싶어 수업 중에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가 수업이 끝나고 물어봤다.      


은지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살을 뺄 수 있어? 입시학원에서 특별하게 뭐라도 알려준 거 없어?

고개를 젓더니 “없어요.” 한다.

“없어? 레알? 은지야, 그러지 말고 말해봐. 쌤이 맛있는 거 사 줄 테니 알려주라?”

재차 물었는데도 “없어요.”한다.

“에이 설마? 뭐라도 있지 싶은데?”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허망했다.

“굶어야 돼요.” “굶는 게 답이에요.”

“굶어?”

“굶는 거 밖에 없어요.”

뜨악해서 쳐다보고 있었더니 은민이가 얼른 나서서 수습했다.


“아유 쌤이 뺄 살이 어딨어요. 보기만 좋구먼. 조금 통통하실 뿐이에요. 호호호. 근데, 그것도 정 신경이 쓰이시면 식사량을 쪼끔만, 아주 조금만 줄이시면 되지요. 아유, 진짜로 그것도 안 하셔도 돼요. 예쁜 사람들이 더 예뻐지려고 난리라니깐요. 쌤, 빠이요.” 요러면서 자매가 내려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이구, 저 무뚝뚝한 은지! 사회생활 퍽도 잘하겠다. 제 동생 은민이 말하는 것 좀 보고 배우지.”

속 엣 말로 투덜거렸다.


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내 몸을 보고 텔레토비 닮았다고, 특히 보라돌이 같다고 애들이 그렇게 말하긴 한다. 그래도 살 빼는 방법이 굶는 수밖에 없다니 야속했다. 은지 은민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상대방이 한 말의, 그것도 말하는 태도에 따라 적이 되고 내 편이 되기도 한다.

행동주의 분야에 한 획을 그은 스키마도 그랬다. 말 한마디 잘못해 주변에 적을 키웠다. 아니 화를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게 한 스키너가 한 ‘말’에 대한 큰딸 줄리의 한숨 섞인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께서 한 가지 실수를 하셨다면 사용하신 어휘가 문제였어요. 사람들은 ‘통제’라는 단어를 들으면 파시스트를 생각하죠. 만일 아버지께서 인간이 환경에 의해 ‘터득된다’ 거나 ‘고무된다’고 말씀하셨다면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실제로 아버지는 평화주의자셨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보호하셨죠. 아버지는 ‘어떠한’ 처벌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처벌을 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동물을 통해 먼저 아셨죠. 캘리포니아 주에서 체벌 금지 법안이 통과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

딸 줄리의 걱정처럼 스키너가 평화주의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심리학 박사인 저자 로렌 슬레이터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열 가지의 위대한 심리 실험에 스키너를 첫 타자로 삼았다. <인간은 주무르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스키너의 보상과 처벌에 관한 행동주의 이론”을 첫 꼭지에 풀어놓았다. 로렌 슬레이터가 판단하기에 훌륭한 심리 실험이란 인간의 경험을 압축시켜 본질만 남도록 걸러낸 인생 자체이다. 따라서 이 실험을 통에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스키너와 관련된 난무하는 논쟁으로부터 실험 자체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정밀한 조사작업에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이 책은 그러한 결실이 빚어낸 결과물에 해당한다.   

   

책에는 스키너의 행동주의를 적용하여 교통안전 문제를 해결한 브라이언 포터의 사례도 나온다. 실험 심리학자인 그는 스키너 박사의 행동주의가 사회적으로 유익함을 가져다줬다고 설파한다. 행동기법을 이용해 위험한 운전행위를 줄일 수 있었고, 사람들이 처벌보다 보상에 더 많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스키너 박사의 행동 테크닉 덕분에 불안 장애 환자들이 공포증을 극복하거나 제거하는데 도움이 됐다며 스키너 박사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         

  

그에 비해 스키너와 동시대를 산 제롬 케이건 교수는 스키너 박사의 기여도를 다소 무시했다. 지금 쓰는 책의 1장이 스키너여서는 안 된다고 강변했다. 스키너가 손다이크의 작업을 정교하게 마무리하긴 했지만 다른 인지적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이에 저자는 스키너의 실험이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서 파생된 것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스키너를 지지한다.       


스키너 박사의 업적이 동시대 교수에 의해 폄하되는 것을 보며 '맥도널드'의 창립 실화를 다룬 영화 <더 파운더 The Founder>가 떠올랐다.  



52세의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은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다. 그의 운명에 획기적인 사건이 생긴다. 바로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에서 맥도널드 형제의 식당을 발견한 일이다. 햄버거를 주문한 지 30초 만에 나오는 혁신적인 패스트푸드 시스템에 감탄한 그는 맥도널드 형제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다. 사업권을 따낸 레이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인 프랜차이즈 사업 구상, 비용 절감을 위한 밀크셰이크 파우더의 도입, 매입한 부지의 임대를 통한 점주들에 대한 통제권, 이것들을 활용해 승리의 콘셉트를 고안해 낸다. 또 맥도널드 형제들이 만들어 놓은 황금 아치의 상징적 잠재력을 재발견해 낸다. 레이는 맥도널드 체인점들이 “미국의 새로운 교회”가 되도록 함은 물론 미국의 욕망과 가치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맥도널드 형제와의 분쟁 과정에서 "자네가 대체 무슨 아이디어를 냈는지 하나라도 말할 수 있나?"라며 맥 형제들이 그를 흡협귀 취급할 때 "나는 승리의 콘셉트를 고안해냈어"라고 되받아친다.


영화 속 레이 크록은 말한다.

“재능으로는 안 된다. 재능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다. 교육으로도 안 된다. 세상은 고학력의 낙오자로 가득하다. 천재성도 소용없다. 이름값을 못하는 천재가 수두룩하다. 전능의 힘을 가진 것은 끈기와 투지뿐이다.”라고.


혹자는 순진한 맥도널드 형제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고 레이 크록을 비난하지만 명실공히 맥도널드의 창업자로 등극한다. 그의 비정함을 손가락질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감독은 레이 크록편이다.     

 


스키너의 가치를 폄하하고 훼손하려 했어도 아직도 스키너의 위력은 유효하다. 물론 『마음의 작동법』에서는 자기 결정성 이론’으로 이를 부인하지만 말이다. 보상과 처벌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결정한 자발적 선택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의 스테판 코슬리 심리학 교수는 “우리의 인식 가운데 일부분만이 전두엽 피질에 의해 중재” 된다고 하며 “그 밖의 학습은 상당 부분 습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요즘 과학자들은 스키너 박사가 연구한 신경 물질에 관한 새롭고 흥미진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며 스키너 박사의 이론이 다시 등장할 거라고 확언한다.  


저자 로렌 슬레이터는 스키너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고 긍정적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까지 자기 손으로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 원리 덕분이라고 공을 돌린다. 수저 한 번 들 때마다 보상으로 준 담배 한 개비, 공포증과 공황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체계적 둔감법, 자극 범람법을 활용한 행동 치료는 오늘날에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스키너의 업적을 전한다.      


실제는 긍정적인 측면과 빛나는 업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키너에 관련된 소문은 대체로 음험했다. 특히 딸과 관련된 것이 그렇다. 상자 안에서 키워진 둘째 딸 데보라와 관련된 소문은 드라마틱했다. 그녀가 서른한 살이 되었을 때 정신이상자가 되어 학대혐의로 아버지를 고소했지만 패소했다. 그러자 몬테나 주의 한 볼링장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 두 발의 울려 퍼진 총성으로 행동주의의 종말이 왔다는 것이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데보라는 영국에서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딸을 훈련시키려고 갑갑한 상자 안에 2년 동안 가두었다느니, 종과 음식 쟁반 등 강화와 처벌이 될 만한 것들을 집어넣고 그래프로 그렸다느니 하면서 스키너에게 악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실제 저자가 찾아가서 본 상자는 어린이 놀이터를 발전시킨 것에 불과했다. 상자에는 자동 온도조절장치가 있어 호흡곤란이나 코 막힘 증상이 생기지 않고 담요마저 필요하지 않았다. 냄새와 습기를 흡수하는 특수재질의 심으로 둘러놓아 빨랫거리 또한 절반으로 줄어들어 남는 시간을 아내가 다른 일에 쓸 수 있었다. 스키너의 상자는 아무런 위협도 없이 보상만 해주는 환경을 마련해 딸이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고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갈 수 있도록 키우고자 한 아빠의 사랑이 담긴 발명품이었다.  


스키너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나쁜 소문들을 불식시키기 위해 저자는 많은 부분을 공을 들여 서술한다. 잔인한 이데올로기 주의자로서의 스키너와 놀라운 발견을 한 과학자로서의 스키너를 분리할 수 있도록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우리를 상자 안에 가두기 전에 우리가
 그를 상자 안에 가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저자의 안타까움과 스키너의 괄목할 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스키너를 불온시하는 것 역시 그가 사용한 ‘언어’

때문이었다.   

   

책에 따르면 스키너는 하버드 대학으로 떠나기 전까지 2년 가까이 다락방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워왔다. 서정적인 문학 작품을 쓰던 사람이 어떻게 ”예술보다 과학이 더 큰 구원이 된다 “는 말에 매료될 수가 있었을까?


저자가 발견한 서류철 파일의 페이지 맨 밑에 적혀 있는 “나는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라는 말처럼

스키너, 나도 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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