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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Apr 21. 2020

죽음은 삶을 낳고, 기억은 글쓰기로 살아난다

죽음을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환영幻影은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친정어머니가 가셨다     


친정어머니는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언어장애와 한쪽 팔다리에  마비가 와서 마지막 생을 놓으실 때까지도 가족들과 소통이 잘 안 됐다. 유일하게 친정아버님만 엄마의 말을 알아들었다.   

   

친정은 방이 딸려 있는 자전거포를 하고 있었는데 구조가 독특했다. 건물 안에 가게가 있고 그곳을 돌아가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에는 ㅁ자로 된 마당을 중심으로 안방과 여러 개의 건넌방이 있고 화장실 옆 계단 위로 옥상이 있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끝에는 가게와 연결된 작은 유리창이 있는 쪽문이 있었다. 쪽문 창으로  가게 안의 사정을 다 볼 수가 있었다. 그 문을 열면 바로 가게로 나갈 수가 있었다.


가게 밖은 큰 길가라서 트럭이나 버스들이 지나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자전거 수리를 하고 돈을 받으면 안방에 앉아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가 냉큼 받았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돈 주는 것을 기꺼이 하고 그 돈을 받은 엄마는 엄청 기뻐하셨다. 엄마는 손님이 없을 때도 소일 삼아 안방 작은 문을 통해 창밖을 내다봤다.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했는데도 그 문에 턱 받치고 있다가 아버지께서 돈을 주시면 한 손으로 치마폭에 받곤 하셨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깊어만 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려고 앉아 있지도 못했다. 그 좋아하던 소일거리 나마도 그마저 못하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몇 주 전부터 밥을 드리려고 앉혀놓으면 그 쪽문을 손짓하며 두 손으로 내쫓는 시늉을 하셨다. 심지어 벌벌 떨면서 머리를 싸매셨다. 나중에는 진저리를 치며 우셨다.

"엄마, 왜 그래. 아니, 왜 그러는 데?" 해도 허공에다 두 손을 휘저었다. 엄마를 물끄러미 보시던 아버지께서

"임자! 이젠 가야지, 내 곧 갈 테니 무서워하지 말아요. 애들 걱정하지 말고. 내 곧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시며 엄마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 자리에 눕혔다.


눈물 자국으로 번진 엄마가 잠이 들자 아버지께서 입을 여셨다.

니 엄마 곧 가실 것 같다. 요즘 검은 망토를 쓴 남자가 안방 쪽문으로 들어오려고 해. 내가 못 들어오게 소리치고 막아도 어쩔 수가 없어. 처음엔 한 놈이 문밖에 서 있더니 이제는 두세 놈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어제는 그놈들이 안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왔어. 저승사자가 오는 꿈을 두 주째 꾸고 있다.

하시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셨다. 연기와 한숨이 뒤섞여 매캐한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그 말이 있었던  그 주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삶은 우연일 수 있어도 죽음은 고의적이다”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의 토니 모리슨의 소설 『술라』에 죽음은 고의적라는 표현이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퇴역 군인 섀드랙이다. 그는 삶을 감당할 길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어 온통 자살만 생각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웃들에게 자살을 권고 하기도 하면서 자살을 공공연한 사실로 만든다. 급기야는 마을의 행사로 날을 잡아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도록 ‘전국 자살일’을 자리 잡기에 이르게 한다.


구약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사드락은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죽지 않고 살아났듯이 이미 섀드 락이라는 이름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기에 섀드랙이나 마을 사람들은 죽음을 우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이 고의적”이란 문장에 과거가 소환되어 달려왔다.

친정어머니의 병세가 좋아지진 않았어도 크게 나빠지지 않아서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우리 가족 중 친정아버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셨다. 그랬었기에 우리에게 엄마의 죽음은 느닷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문학적인 감수성이 풍부했던 작은 언니가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가 없어. 이건 분명해!
신이 고의적으로 우리 엄마를 데려간 거야.” 하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의 저자 이력이 참 독특하다. 아이티 출신으로 열두 살 때 뉴욕으로 이주해 어린 나이에 미국의 신예 작가로 떠오른 이드위지 당티카이다. 데뷔작인 『숨결, 눈길, 사랑』(Breath, Eyes, Memory)도 25살에 출간할 정도로 소설적 재능이 명민했다. 선정만 되기만 하면 베스트셀러는 보장된다는 <오프라 북클럽>에 처녀작이 소개가 되어 60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작가 서문에 밝혔듯이 지난 수년 동안, 죽음에 대한 글쓰기에 도전하고 이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글 쓰는 방식을 연구함으로써, 또 최근 경험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포함해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더 많이 남기기 위해 집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만일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많은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또 에드위지 당티카 처럼 나도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애도의 시간을 글쓰기로 물들이며 기억을 불러내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바람대로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떠난 이들을 기억해 냄으로써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쉬워지리라.         


이 책을 읽으며 에드위지 당티카가 그동안 공부했던 문학수업의 궤적을 찬찬히 훑어볼 수 있었다. 수많은 작품과 거장들의 문학 작품에서 죽음이 어떻게 다뤄지는 지를 탐구하는 글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위대한 작품 속에 나타난 죽음의 관한 내용을 엿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도 불가피하게 죽음이 엄습해 옴을 겪어여만 한다고 작가는 담담하게 고백한다.


어머니가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려면 죽음이 우리 자신을 엄습해 오는 느낌을 불가피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죽음이 방에 들어와 잠시 멈춰 섰다가, 우리 곁을 지나쳐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때가 되면 우리들 가운데 먼저 죽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죽는 사람이 있을 뿐,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 42쪽



죽음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하는 상실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든 사물과의 추억에 관한 것이든 그 빛을 잃게 한다. 하지만 생존자의 기억을 통해서 이야기로 또는 글쓰기로 바래진 추억들을 소환해  살아남게 한다.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10주년 추모 집회 때 2001년 테러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행사에 참석해 손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1927)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을 낭독했다.


 “산 자를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자를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땅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이란 바로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이다.”


우리에게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라야 “다리”를 찾곤 한다. 에드위지 당티카 역시 춘계 워크숍에서 만난 어여쁘고 재능 있는 한 여류 시인이 몇 주 뒤 두 살 배기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녀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겠지만, 살아생전에 니키 지오바니의 시 <시인들>을 들려주면 좋았을 걸 하며 아쉬워한다.    

  

시인들은
자살을 하면 안 돼요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에는
상상력이나 감정이 없는
사람들만 있거든요.

-니키 지오바니의 <시인들>   

 


친정 엄마 살아생전에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살가운 시간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막내딸이 오기를 안방 쪽문에서 시선을 떼지를 못했다는데, 그때도 일을 하느라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일의 특성상 바로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해 질 녘에서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친정 올캐 말이 어머님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바깥 쪽문 쪽으로만 눈이 가 계셨다고 했다. 크게 울음도 나오지 않았고, 그냥 이제 더 이상 고생하시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슬픔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모든 내러티브 식의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승으로 내려가 죽은 자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죽은 이들과의 협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죽음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글을 쓸 때조차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죽음이란 결국 모든 일의 종국적인 결과이자 모든 이야기의 최종 결말이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 193~193쪽        

죽음을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환영은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죽음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글을 쓸 때조차”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환영幻影은 종종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이 환영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죽음이든 죽음에 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게 한다.

결국 죽음은 삶을 낳고, 기억은 글쓰기로 되살아난다.


   

P.S:  이 책에 소개된 책을 다 읽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특히 숀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꼭 읽으리라 다짐하게 된다.    

 

[신형철의 내 인생의 책]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

http://news.zum.com/articles/46821552

문학동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선정한 하루키 단편 베스트 7" 중에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https://ko-kr.facebook.com/munhak/posts/99394770395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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