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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Aug 04. 2020

음모론, 약자의 무기인가 지배의 망치인가!

“음모론의 시대”에 ‘책임윤리가’의 자세가 필요하다

블랙리스트, 수면 위로 부상하다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음모론은 미국 영화계에도 있었다. <트럼보>(Trumbo, 2013)는 <로마의 휴일>을 쓴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와 관련된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정치 스캔들에 희생양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11개의 가짜 필명으로 2번의 아카데미 수상을 하는 쾌거를 이룬다.     

 


출처: 네이버 영화



트럼보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경위는 영화 <트럼보>의 각본을 맡은 존 맥나마라로부터였다. 그는 트럼보에게 이름을 빌려줬던 이안 맥켈란 헌터에게 글쓰기를 배우면서 내막을 알게 된다. 당시 트럼보는 세계에서 최고로 돈을 많이 받는 각본가였다. 하지만 올곧은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존 맥나마라는 이러한 과정에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각본을 썼다고 했다.       


트럼보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를 탄압하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있었다. 냉전 상태에서 미국은 공산당원들을 색출에 내기 위해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를 조직했다. 위원회의 인물들은 공산당원으로서 활동했다는 혐의를 씌워 블랙리스트를 만든다. 이 위원회의 청문회에  달튼 트럼보를 위시한 동료 작가들은 증언을 거부해 ‘할리우드 10’으로 지목되어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트럼보는 블랙리스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짜 이름으로 활동을 하며 다른 할리우드 10에게도 일할 기회를 제공한다.     

 

음모론에는 양가감정이 존재한다. 망상이나 루머로 치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그것이 진실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판단 보류로 남겨진다. 음모론과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르기 위한 합당한 기준이 없기에 소모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음모론은 음지에서 꽃을 피우며 확장되거나 변주된다.      



왜 음모론이 판을 치는가     



『음모론의 시대』는 음모론을 지하 세계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린, 이를테면 학문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이 책은 띠지의 “사회학자 전상진 음모론을 통해 우리 사회를 진단하다!”의 표현처럼 왜 우리 시대에는 음모론이 판을 치는지? 음모론의 사회적 기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파한다. 또 음모론이 약자의 무기인가 지배의 망치인가에 대해서도 촘촘하게 설명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전상진 교수는 음모론을 베버의 종교 사회학, 그것도 신정론과의 비교를 통해 분석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래야 비웃음이나 걱정, 더 나아가 낙인과 위협을 없애거나 줄이는데 버팀목으로 쓸 수 있다고 고백한다. 신정론神正論이란 “고통, 악, 죽음과 같은 현상을 신의 존재에 의거하여 정당화하려는 믿음 체계”를 말한다. 신정론은 착한 사람인 내가,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를 『음모론의 시대』에서는 다섯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로 베버는 신정론이 기대와 현실의 간극 discrepancy을 문화적으로 채우는 노력이라고 했다. 고통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있을 때 발생한다. 문화의 존재 가치는 그 간극을 의미로 채울 때 드러난다. 둘째로 베버는 문화적 노력인 신정론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음모론이 신정론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문화적 쓸모가 생긴다. 셋째로 간극에서 오는 고통과 곤경은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그들이 선호하는 신정론 역시 다름을 보여준다. 넷째로 서로 경쟁하는 사회 집단들이 신정론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고 베버는 지적한다. 다섯째로 베버는 근대를 살아가는 방편으로 책임윤리를 제안했는데 음모론의 시대에도 책임 윤리는 유효하다. 

     

종교적 신정론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이 음모론이다. 저자는 세속적 신정론, 사회 정론의 한 유형으로 음모론을 자리매김한다. 또 “고통을 설명하는 문화적 장치라는 점에서 신정론과 이데올로기와 음모론”을 동급으로 본다. 다만 “신정론과 이데올로기가 밝은 곳에서 활약한다면 음모론은 어두운 곳에서 활동한다”는 점이 다르다며 그 차이점을 분명히 했다.      


음모론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이유는 그 음모들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의 국가기간이 전 세계 정보의 흐름을  감시한다든가 세계 정상들의 휴대폰까지 도청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또 하나는 비난 문화의 확산과 조직화된 무책임이다.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전가하고 회피하는 책임의 위기 시대가 도래했기에 음모론이 자가증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음모론의 사회적 기능     


『음모론의 시대』에서는 음모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설명할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혼돈은 파국 그 자체이거나 파국으로 치닿게 한다.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장치들이 고통의 이유를 밝히고 혼돈을 관리하는 것처럼 음모론의 과업 역시 고통을 설명하고 관리한다. 죄인을 가려내고 책임자를 찾아내게 한다.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이 고통 자체를 없에지는 못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려준다. 그 의미를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위안받고 그 고통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 시대의 핵심적 모순을 무한정 커지는 기대(권리)와 그래서 더 초라하고 비극적인 현실(능력)의 간극인데, 이를 채울 방도는 여럿이다. 과거에는 신정론이 이를 담당했고, 오늘날에는 자기 계발과 음모론이 거든다. 외관은 달라도 쓸모는 같다.    

『음모론의 시대』, 88~89쪽     



클리퍼드 기어츠의 도움을 받아 신정론의 문화적 쓸모를 인지적, 감정적, 도덕적 기능으로 정리해 놓았다. 고통이 ‘왜’ 자기에게 닥쳐왔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 인지적 쓸모이고, 고통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진정시키거나 위안을 주는 것이 감정적 쓸모이다. 고통이 자신의 부도덕함이 아닌 오히려 도덕적이기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도덕적 쓸모이다. 


마찬가지로 세속적 신정론인 음모론 역시 고통에서 뻗어 나온,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곤경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현재 처해 있는 곤경의 원인을 보여줌으로써 고통을 참아낼 수 있도록 한다. 음모론을 고통의 신정론과 연결함으로써 저자의 우려와는 달리 주변의 비웃음이나 걱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책에 따르면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있을 때 지그문드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두 가지 해법을 말한다. 

‘전기적 해법’과 ‘상상적 해법’인데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전기적 해법’이다. 전기적 해법의 유일한 대책은 자기 계발이다. 개인이 책임을 지고 부족한 부분을 메꿀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실효성이 없는 대책이다. 상상적 해법은 비극의 원인을 적과 원수 들을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해결책을 찾는다. ‘상상적 해법’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음모론이다. 두려움과 분노를 음모 집단에게 환치시킴으로써 ‘도덕적 혼돈’은 깔끔하게 정리된다. 

     

            

약자의 무기일 수도, 억압의 망치일 수도     


음모론이 약자의 무기로 쓰일 때는 민주주의를 진작시킬 수 있지만 억압의 망치로도 쓰일 수 있음을 저자는 중심을 잡고 펼쳐나간다. 추정이나 설명에 그치는 저항의 음모론은 적어도 설명이 지목하는 원인 제공자를 위험에 처하게는 만들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원인제공자로 지정된 자들이 “권력의 행사자”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음모론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에 통치의 음모론은 원인 제공자를 위험하게 만든다. 탐사와 조사가 필요치 않은 확정 판단이기에, 추궁하는 집단은 위력을 가할 수 있다. 희생양 집단이 힘이 없기에 원인제공자를 위기에 빠뜨리게 한다. 권력 유지를 위한 강자의 망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 음모론은 정치 전략으로서의 쓸모를 지닌다. 첫째는 지지자를 “동원하는 수단”에 쓰임으로써 제 힘을 모으는 도구로서 기능을 한다. 둘째는 “정적을 비난”하는 데 활용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도구로 쓰인다. 셋째는 필요한 비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수단”에 이용함으로써 경쟁자의 의혹에 맞대응하는 전력이다.      

      


“제가  오늘 하는 얘기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오랜 세월 서로에게 남긴 수많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출처: Netflix 영화 캡처한 것임



달톤 트럼보가 전미 작가 조합 로렐 상 수상자로 지명돼 발표한 수상 소감이다.  

트럼보는 블랙리스트가 악마의 시절이었으며 미약한 개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시절이었다며 토로한다. 각자의 본성과 필요와 신념에 의해 반응했다며, 어둡던 시절에 누가 악당이고 누가 영웅인지 따질 이유는 없다고 한다. 오로지 상처를 치유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함을 강조한다. 트럼보가 활동하던 시절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부당한 표적 조사를 받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을 강요받았음은 물론이다.     

 

정치적 신념을 근거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를 처벌하던 반공주의자들의 횡포는 막을 내렸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블랙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낸 것은 분명하다. 일을 할 수 없어 가난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한 부분에는  책임을 따질 계제가 못 된다. 하지만 현재 횡행하고 있는 블랙리스트 류의 음모론에는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가의 자세가 필요하다. 저자 역시 넘쳐나는 음모론의 시대에 책임감과 균형 감각을 회복하려는 ‘책임윤리가’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픽사베이-메르켈 총리: 미 첩보 당국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를 10년 이상 도청했다고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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