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처럼 캄캄한 길도 헤매지 않고 이곳까지 걸어왔다
진순희
어린 시절 여덟 식구 둘러앉아 먹던 마른오징어
몸통과 긴 다리는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이 차지했다
성별에 따라 달라지던 밥상
이 견고한 규칙에
고등어의 몸통과 대가리도 분리되었다
울릉도 여행길에 사 온 오징어 한 축
짭조름하니 두근거리는 냄새에
살그머니 다락으로 올라갔다
어른들 집을 비운 틈으로
오징어 맛에 눈이 뒤집혀
여덟 마리를 몽땅 먹어치운 날
규칙에 금이 가고
여덟 개의 눈알만 뒹굴었다
어머니가 벽장문을 열 때마다
몰래 삼킨 비밀이 튀어나왔다
오징어 몸통처럼
중심이 되고 싶은 그 시절
여자들은 모두
맛없는 눈깔만 질겅거렸다
그 수많은 눈을 삼킨 덕분에
먹물처럼 캄캄한 길도
헤매지 않고 이곳까지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