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 인연 따라 맺어졌다가 시절이 다하면 끝이 난다는 말인지
진순희
내 어릴 적 당산동에는 소마당이라는 공터가 박혀있었지.
철길 주변 허름한 동네 한가운데 쇠심줄처럼 버티며 골목으로 이어져 밤으로 낮으로 소리를 낳았네.
넓적한 소마당에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 공기놀이, 술래잡기, 말뚝박기로 재잘거리는 소리.
두부장수 딸랑이, 엿장수 가위소리,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들 소리, 궁핍한 살림살이 지지고 볶으며 밤마다 때리고 맞으며 동물처럼 울부짖는 소리.
세상 잡다한 소리들이 섞여 밤낮으로 부유물처럼 떠다녔지.
기적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우르르 철길로 뛰어가 양팔 벌려 서로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네.
잘 난 기차가 밟고 지나가는 쇳소리와 배고픔에 절었던 우리들 목소리 중에 누가 더 큰가 싸움을 걸었던 거야.
열차의 꼬리 아득히 사라진 뒤 침목과 자갈밭으로 멋쩍게 떨어져 죽어가던 우리의 외침, 그 허망한 소리들―
길에도 수명이 있다.
용케 명운이 좋아 천수를 누리기도 하지만 소마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네.
에이원하우징, 퍼스트빌리지, 아틀리에 파비앵…
그 옛날 우리의 왁자한 왕국이었던 자리에는 죽은 듯 소리를 잃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길도 인연 따라 맺어졌다가 시절이 다하면 끝이 난다는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