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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Dec 08. 2020

죽이러 다시 갑니다

내, 이놈 석환을 죽이러 다시 오겠다고.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전 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윤정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지금의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남들이 눈치채는 건 아닌지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요즘 들어 계속 살의를 느끼는 중이었다. 날을 잡아서 그놈을 죽이러 가야겠다고 계속 마음을 먹고 있었다.


윤정은 국문과를 졸업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같은 학교의 한의과 대학에 다니는 석환과 만난 지는 햇수로 5년째다. 윤정이네는 아빠가 자그마하지만 튼실한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집안이 제법 윤택했다. 그에 비해 석환은 밥 대신 감자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깡촌 출신에다 그 지역에서도 몹시 가난한 축에 속했다. 식당에서 감자 반찬만 나와도 질색을 하고 감자탕은 손도 대지를 않을 만큼 감자를 싫어했다. 지방 출신은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예과가 끝나고 한의학과 들어가면서 윤정이네 집으로 들어와 눌러살았다. 


기숙사 밥은 죽어도 먹기 싫다며 계속 말라가는 석환을 윤정이 아버님이 보다 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석환을 마음에 들어 한 윤정이 부모님은 예비 사위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넓고 쾌적한 방을 제공했음은 물론이고 공부하는 그를 위해 철철이 보약을 갖다 바쳤다. 


시골에 계신 석환이 어머니께서 아들이 사는 방을 보고 싶다고 올라와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거실 바닥 아래 비단잉어가 물결치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닥이 깨지기라도 할까 살금살금 디디며 별천지라며 놀라워했다. 석환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선 절대 윤정이네 부모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석환이 너밖에 없다는 당부도 있지 않았다. 윤정이한테도 네가 우리 아들 은인이라며, 한미한 우리 집안을 살릴 여자라며 두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중소기업 치고는 아주 단단하게 경영을 잘해서 윤정이 아버지 회사가 잘 굴러가고 있었다. 

석환이 한의사 시험에 붙기만 하면 봄에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잡아놓은 상태였다. 

가는 눈으로 늘 주변을 살피는 석환을 보며 윤정이 어머니는 윤정이한테 조심스럽게 속내를 비친 적이 있다.      

윤정아 너랑 네 아빠가 석환이를 아들보다 더 믿고 좋아하는 데 왠지 나는 석환이 속내를 모르겠더라. 얼굴빛도 너무 어둡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거가 영 신경이 쓰여.    

  

윤정이 엄마를 쳐다보자,


아마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그런가. 엄마가 괜한 소리를 해 우리 딸 마음을 어둡게 한 건 아니지?


하면서 화제를 얼른 딴 데로 돌렸다.     

1월 중순 석환이 한의사 시험을 보고 얼마 안 있어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석환은 이게 다 윤정이 네 덕이라며 평생의 빚을 졌다고 했다. 너한테 잘하는 것으로 살면서 이 빚을 다 갚을 거라고 했다. 절대 너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아버님 어머님이 안 계셨으면 이런 영광을 꿈도 못 꿨을 거라며 석환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봄이 되면 우리 결혼하자고 윤정을 힘껏 안았다. 

기쁨도 잠시였다.


윤정이 논술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동생 윤석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빠가 병원에 실려 갔다고. 점심시간이 지나서 보니 아빠가 회사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혼수상태에 있다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윤석이 나이 고작 17살,  고1이었다. 부모님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대중교통도 이용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회사 직원들이 나서서 장례를 치르는 사이 윤정이네 가족은 얼이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석환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장례 기간 내내 석환은 밖에 나가 있거나 뻔질나게 나가서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윤정의 어머님은 석환을 붙잡고 서둘러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윤정이 아빠가 석환이 자네와 윤정이가 결혼하는 것을 못 보고 가셨지만, 남자가 없어 집안이 썰렁하니 얼른 결혼해서 진짜 우리 식구가 되자고 간청을 했다. 

웬일로 석환이 시원하게 대답을 못 했다. 합격만 하면 당장 결혼하자던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길일이고 뭐고 안 따진다고 하니 자네가 좋은 날을 잡으라고 해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께 여쭤보고 말씀을 드린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불길한 마음을 안고 윤정은 삼척으로 내려갔다. 석환과 석환의 어머니가 마당에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는 윤정을 보더니 석환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여기가 어디라고 니가 오냐는 말에 윤정은 할 말을 잃었다. 


너한테 신세 진 거 내 살면서 마음으로 다 갚으마. 우리 석환이 놔주렴. 


석환이 어머니의 말에 윤정을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봤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석환이 오빠랑 헤어지라는 말이에요? 


아유 얘가 이렇게 어리벙벙해서 어따가 쓰니?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그래, 우리 석환이랑 헤어져 줘.


한쪽 구석에서 땅에다 발길질만 하는 석환에게


오빠 이게 무슨 일이야. 알아듣게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이냐구?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석환에게 애타게 물었다.


그때였다. 쭈뼛거리며 땅만 쳐다보고 있는 석환의 등짝을 그의 엄마가 후려쳤다.


게 서 있지 말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여기는 나에게 맡겨두고.

석환이 우물쭈물하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윤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동네 골목으로 퍼져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기웃거렸다.

석환 어머니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 여편네들이 무슨 구경이 났나. 뭘 기웃거리고 있는 거야. 

밖을 향해 소리를 쳤다.

곧이어 윤정이한테도 소리를 질렀다. 


어디 여자가 없어서 망해 먹은 집 딸년을 며느리로 들여. 어림도 없지.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개뼉다구를 집안에 들이냐구.


하면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환이 네놈이 나한테 이럴 순 없다고. 우리 가족에게, 우리 아빠에게 이럴 순 없다고 주먹을 쥐었다. 

윤정은 결심했다. 

내, 이놈 석환을 죽이러 다시 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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