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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Nov 29. 2020

니가 거기서 왜 나왓!

“절대 변하는 일이 없을 거”라며. 나만 먼저 변하지 않으면~~

현주는 음악 다방 '푸른 성'에서 명훈을 기다렸다.

명훈을 기다리며 며칠 전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실 이들은 연인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사이다. 그 이유는 순전히 현주 때문이다. 명훈이 가까이 다가와도 현주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책을 읽었다. 곁을 내주지 않았다. 명훈이 말을 할 때도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나서야 그에게 집중했다. 주로 명훈의 말을 듣는 편이었고 반응도 고작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현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번은 명훈이 진지하게 물었다.     



현주야 나랑 만나는 거 재미없어? 우리 그만 만닐까?


그제 서야 현주는 명훈에게 정색을 하며 “왜?”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현주의 이런 반응에 명훈은


 “그건 아니고, 미안. 농담  한 번 해봤어.

나랑 있는 거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너는 나랑 있어도 언제나 딴 세상에 가 있는 사람 같더라. ”


푸른성 다방의 DJ는 오늘도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틀어줬다. 가사 내용처럼 어쩔 수 없이 다방 손님에게 노래를 틀어줘야 되는 듯이 DJ는 세상에 지친 얼굴로 우수에 차 있었다.

이곳에 오면 Honesty와 Hotel California, A Whiter Shade of Pale, Angie, Vincent, Dust in the Wind 등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를 들으며 명훈은 현주에게 다짐을 했다.



오크 나무에 노란 리본으로 사랑을 증명했던 것처럼 너도 변치 않을 거지.
난 절대 변하는 일이 없을 거야. 너만 먼저 변하지 않으면.




출처: http://blog.daum.net/bbalkansakwa/15673422

    




명훈은 늘 기타를 매고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노래도 잘하는 데다 인물마저 곱상하게 생겨 가는 곳마다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외모라면 빠지지 않던 그 답게 그런 시선들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였다. 길을 가다가도 나무 아래 벤치만 있으면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를 아주 맛깔나게 불렀다. 속눈썹에 성냥개비 서너 개쯤 올려놔도 될 만큼 속눈썹 또한 길었다. 구경하던 젊은 아가씨들이 꿈을 꾸듯 명훈을 보다가 명훈의 옆에 무덤덤하게 서 있는 현주를 째려봤다. 보물을 손에 쥐고도 아무런 가치를 모르는 여자에 대한 환멸이랄까. 현주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어 명훈을 채근해 보지만, 이미 다른 여자의 마음을 꿰뚫은 명훈의 행동은 느려 터지기만했다. 자리를 뜨면서도 오히려 구경꾼 여성들에게 미소 지으며 가볍게 목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주는 개의치 않았다.    


 

명훈의 친구 형석은 푸른성 다방 근처의 음악다방 '엘도라도'에서 DJ를 하고 있었다. 형석의 여친 은주는 거기 손님으로 왔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였다. 명훈과 만날 때면 형석도 같이 나왔는데 은주 친구인 뚱녀 민주도 같이 나왔다. 한두 번은 괜찮았는데 요즘 들어 민주가 껌딱지처럼 계속 같이 나왔다.


      

출처: Pixabay



킹 크림슨의 Epitaph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묘비명이란 제목답게 Epitaph 들을 때는 좀 경건하게 마음을 가다듬어 들어야 된다고 현주는 생각했다. 현주는 이 음악을 명훈과 둘이서만 천천히 맛을 새겨가며 듣고 싶었다.  그런데 형석과 은주와 껌딱지는 Epitaph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잘대기 시작했다. 흘러 다니는 풍문을 갖고 와서 사실처럼 떠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연인들이 있었는데 사랑하는 여성이 갱단에 붙잡혀가서 몹쓸 짓을 당한 후에 살해된다. 죽은 연인을 두 팔에 안고 묘지에 묻어 주려고 남자는 골고다 언덕 같은 곳을 천천히 올라간다. 그때 이 처연하고 슬픈 노래 Epitaph가 흐른다.



명훈이 말만 꺼내기만 해도 그 껌딱지는 만반의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웃을 일도 아닌 데도 과도한 리액션으로 명훈의 말에 맞장구를 쳐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민주가 오면 명훈도 신이 나서 더 많이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명훈을 만날 때마다 그 껌딱지가 졸졸 따라 나오고 있었다.

“왜 쟤는 커플들 만나는 자리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나온대?

저도 남자 친구를 만들어서 데리고 나오든가 하지. ”


현주가 불평을 하자 명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민주 쟤?, 재미있잖아. 왜 신경 쓰여?

쟤 뚱뚱하고 못생겼잖아. 신경 꺼.”


명훈이 그렇게 말해도 요즘 들어 현주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왠지 모르겠는데 괜스레 짜증이 나고 어딘가 미심쩍었다. 뭔가는 있는데 잡히지 않는 것이 영 찜찜했다.     


   

명훈은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오자마자 배가 아프다며 배를 움켜쥐면서도 연신 시계를 봤다. 너무 아파서 집으로 빨리 가야겠다며 현주를 얼른 버스에 태웠다. 창밖으로 정류장에 서서 배를 잡고 찡그린 채로 명훈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아픈 데도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곰살맞은 명훈을 보며 현주는 생각했다.

쟨 참 따뜻한 아이야.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지 하면서 명훈이 아픈 게 오늘따라 마음이 쓰였다.



현주는 계획보다 데이트가 일찍 끝나서 생각지도 않게 시간이 많이 남았네 생각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다 깜짝 놀랐다. 영등포 시장 로터리를 돌 때였다. 아프다던 그가 보였다.  어머, 왜 저기 가 있는 거지? 아픈 거 아니었어? 이런 생각을 하며 유심히 봤다. 버스 반대편, 시장 골목에서 예쁘지도 않은 그 껌딱지와 팔짱을 끼고는 명훈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햇볕 속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현주는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니가 거기서 왜 나왓?

아프다며, 아픈 거 아니었어?  


“절대 변하는 일이 없을 거”라며.

 나만 먼저 변하지 않으며~어 ~언  ~~

그 말이 허공으로 맥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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