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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an 25. 2021

능력주의 그 달콤한 허상에 대해

『공정하다는 착각』에 관한 소회

      

‘이상’을 담은 말은 얼마나 허망하고 아름다운가.

‘능력주의’라는 단어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능력 주의자들이 말하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말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장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마이클 샌델은 조목조목 지적한다.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림은 물론 분노를 조장했다. 세계화에 뒤쳐진 노동자들은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는 마이클 샌델 교수를 대신하여 쓴 김선욱 교수의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이 실려있다.      



센델 교수는 “현대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오늘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을 위한 고른 기회를 통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 12쪽  


   

미국의 경우 능력주의적 이상은 학위 소지 여부와 관련된 학력주의 문제로 직결된단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지 학위가 있다는 이유로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잣대가 되어 민주주의를 부패시키기 때문이란다. 학력주의의 편견은 성공한 자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심어주기에 위험하다. 이들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해 반대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고 있단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경멸받아도 되는 것인가?      


7장 <일의 존엄성>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존엄성이 사라져 결국 “절망 끝에 죽음”을 선택하는 노동 계급의 현황이 나온다.

사실 종전 후 1970년만 해도 학위가 없어도 중산층의 삶을 살 수가 있었다. “대졸자 프리미엄”이라고 부를 정도로 1979년 고졸자에 비해 대졸자는 40퍼센트 정도 많은 수입을 올렸었는데 2000년대 들어와서는 80퍼센트까지 높아졌다.      


1971년만 해도 백인 노동계급의 93퍼센트가 고용되어 있었다면 2016년에는 80퍼센트로 떨어진 상태다. 실직자의 20퍼센트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고 2017년에는 고졸 미국인 68퍼센트만이 취업했다.       

일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은 불만과 증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힐빌리 출신의 저자 J.D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 벨트’ 지역에 사는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지칭하는 ‘힐빌리 Hillbilly’는 ‘화이트 트래시’라고 해서 백인 쓰레기로 표현하기도 하고 햇볕에 그을려 목이 빨갛다는 데서 유래된 ‘레드넥’이라는 모욕적인 말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 제조업의 호황기 때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제는 쇠락해져서 실업자들만 넘쳐나고 있다. ‘힐빌리 Hillbilly’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구직을 포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직자 다수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하는 “절망 끝의 죽음 Death of Despair’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은 사망률의 증가가 자살이나 약물 과용, 알코올성 간질환의 만연으로 인한 것임을 찾아냈다.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이기에 ‘절망 끝의 죽음’이라 명명했다.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 』311쪽  

   


“절망 끝의 죽음”이란 단어를 읽는 순간 한국의 20년 여성들이 목숨을 끊는 “조용한 학살”의 기억이 소환됐다. 작년 3월에만도 20대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노동시장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를 못했다. 

정혜주 고대 보건 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보다 8%가 높은 상황”에서 “사회적인 지위로 이전되지 않는 점”에 주목한다. 정 교수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인정 여부는 자살률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책적 지원들이 있긴 하지만 ‘가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에 결혼보다는 독립된 개인으로서 살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에게는 이 지원책은 무용지물이다. 정책에서 배제되어 자살률을 높이는 결과를 양산하기만 한다.       


     




조용한 슬픔         

 

진순희        


       

낙엽이 고요히 떨어진다

녹색 시효가 만료되어 주검들

먹고 버려진 빈 컵라면 용기와 함께

갈 곳 모르고 서성이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던데

코로나 이후 20대 여성 3만 명이

옮겨 앉을 곳

다시 날아오를 날개 하나 없이

일자리를 잃었다

지상에서 지하로 추락한 아픔

낙엽으로 굴러다니고 있다         


대학 진학률도 남자보다 더 높은데도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권도 없이

링 위에 올라보지 못하고 맥없이 스러지고 있다   

  

갈잎은 초록의 시절 거쳐오기라도 했지

버려진 컵라면도 제 몫을 다했는데

무엇 하나 꽃 피워보지 못하고

금 밖으로 밀려나 주춤거리는 청춘

아직은 시효가 남은 저 젊은 꿈을 위해

넓은 등짝 내밀어 업어줄 사람 없는가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할 때 


능력주의의 전형을 오래전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투 two 황'으로 인식되는 과학과 산업계의 두 인물이다. 2005년 연초에 이들은 조선일보의 "한국경제 10대 과제'에 나와 기염을 토했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은 "첨단 과학기술 산업이라는 게임은 나눠 먹는 게임이 아니다. 이긴 자가 독식하는 게임이다.", "뛰는 말을 날게 하고, 나는 말을 로켓처럼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다. 황우석 박사 또한 "국산품만 가지고는 안 된다. ", "'너는 1년에 60억 원 받고 나는 600만 원 밖에 못 받느냐'라고 생각하는 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며 승자독식의 시대 더 나아가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이처럼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은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석하려는 일은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 헤겔과 뒤르켐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헤겔은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에밀 뒤르켐은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헤겔의 노동론을 이어갔다. 

헤겔과 뒤르켐, 은 일을 소비만을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여겼다. 


책에서 언급했듯이 최근의 정치경제학은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다. 이러한 시각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뜨리고,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의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로버트 캐네디는 우애나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의 가치는 소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받는 직업 생활"을 할 때 가능하다고 했다. 참 매력적인 말이다. 수준 있는 급여만 받아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존경까지 받는 직업 생활이라니.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까지 받는, 슬기로운 직업 생활 


공화당 대통령 후보 미트 롬니의 정책보좌관이었던 카스는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공화당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경제성 장보다 좋은 사회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공화당에 일자리 창출을 요구했다. 이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상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술이 없더라도 임금을 보전해 수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주장한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로 우리의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기에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만들었다고. 



일의 존엄을 살리려면 투기자본을 억누르고 생산적인 노동을 기리고 인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마이클 샌델은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없애는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라고 한다. 세금 징수는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한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하자는 그의 말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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