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침묵을 견디는 힘

by 진순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비극은 말에 대한 오해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이해 못할 때 시작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년 넘게 하고 있는 마음담론 모임에서 학인 한 분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문장을 낭독했다.

위의 글은 『프로이트의 의자』의 chapter -<사소한 것에 목숨 걸다: 오해와 집착>편에 실려있는 글인데, 들으면서 오래전의 ‘침묵’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어 왔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몇십 년의 일이다.

춘천 ‘이디오피아의 집’에서 크리스마스이브날 남편은 내게 청혼을 했다. 건물 주변을 크리스마스트리로 온통 띠를 둘러 마치 동화 속 궁전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이디오피아의 집 다리 아래 밤물결은 바람에 트리가 흔들릴 때마다 찬란하게 일렁였다.

엘튼 존의 <투나잇>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음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엘튼 존의 투나잇! 투나잇 소리가 들렸다. 투나잇! 오늘 밤이라고!


투나잇! 소리에 남편이 등을 뒤로 젖혔다. 남편은 지금도 샤이하다. 수줍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앞으로 우리가 가꾸어 나갈 집에 대한 그림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까만 바둑돌이 졸졸이 박힌 마당을 지나면 현관이 나오는 3층 양옥집이 보였다. 마당 한켠으로는 맨드라미와 키 작은 꽃들이 있는 꽃밭도 있었다.

현관을 들어가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창이 있는 3층의 다락방 같은 곳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었다고, 어릴 때 동시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다고, 공책에 매일 시를 옮겨적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내가 언뜻 비친 적이 있었나 보다. 이 남자가 그걸 잊지 않고 찬찬하게 종이에 다 담아냈다. 공간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하고는 그 당시 남자들이라면 다하는 그 말을 진땀 흘리며 내뱉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 주겠다” 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가? 지금도 모를 일이다.

긴장을 하며 쩔쩔매며 말하는 남자한테 거절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투나잇은 흐르고 있었고 이디오피아의 집에는 다정한 연인들로 넘쳐났다. 청혼하기 좋은 밤이었다.



그가 내게 보여줬던 까만 바둑돌 같은 마당은 어데론가 사라지고 신혼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잔인할 정도로 초라했다. 문을 열면 바로 방이 나오는 마당 한 켠의 창고 같은 집에서 시작을 했다. 나 만나느라 집 얻을 돈을 다 써서 그 정도의 집 밖에 얻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몇 년 있다가 빌라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부터 남편은 총을 사고 싶어 했다.


까만 바둑돌이 길게 마당을 가로지르는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했다.



당시에 벨기에제 엽총의 가격이 살고 있던 빌라 전세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사진 촬영하려면 굵직한 스폰서를 만나야 되는데, 그러려면 사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꼭 총을 사야 되느냐 왜 총잡이 노릇만 하려 드느냐? 몰이꾼도 있지 않느냐. 당신은 젊고 다리도 튼튼하니 몰이꾼 역할을 하면 된다고 일축해버렸다.

한 주 지나고 나니 총얘기를 또 꺼냈다.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끈질겼다.


전세 살면서 엽총을 산다는 것은 발가벗고 은장도 차는 격이니 그런 우스운 짓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딱 잘랐다. 보통 때의 그 같으면 순순히 말을 듣는 사람인데, “그게 아니고 남들 다 사는데, 나 혼자 총이 없으면 뻘쭘하잖아", 토를 달며 집요하게 말을 했다.

조자룡이 칼 쓰듯 함부로 돈 쓰지 말고 얼른 집살 궁리나 하라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당연히 총을 안 샀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총타령이 잠잠해지자 코란도로 넘어갔다. 집도 없으면서 코란도를 사고 싶어 했다. 또 촬영을 핑계로 코란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집도 절도 없으면서 차를 산다는 것은 정말로 빨가벗고 은장도 차는 격이니 안 된다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남편은 그때 이미 총을 사서 큰 형님댁에 맡겨놓은 상태였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우연찮게 들통이 났다. 내가 알아낸 것도 아니고 큰 형님의 전화 때문이었다. 큰 형님이 부부 싸움하면서 곽씨집 남자라면 진저리가 난다며 “자네, 서방님 엽총 산 거 모르지. 우리 집에다 감춰놓고 산으로 들로 두 형제가 의기투합해 몰려다니면서 사냥하러 다닌다네.” 이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 속이 하얘지는 듯 했다.

내가 아무리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커다란 트렁크 두 개에 짐을 쌌다. 그 길로 확 친정으로 갈까 하다가 친정까지 쫒아오면 볼썽사나울 것 같아서 남편이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 오면 바로 나가려고 현관 입구에 트렁크 두 개를 갖다 놨다.

이미 큰 형님한테 들어서인지 트렁크를 보더니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식탁에 앉혔다. 저 가증스러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싶어 빤히 쳐다봤다.


조곤조곤 나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 객쩍은 소리를 하면서 쓸데없이 농담 같지도 않은 말을 했다. 당신은 화낼 때가 제일 예쁘다느니, 자기 친구 이름을 대며 정수 걔는 큰일 났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통풍 걸려 곧 죽게 됐어. 병원에 입원했어. 내일 우리 병원에 같이 가볼까? 정수 씨가 다 죽게 됐다는 말만 했다.


나는 대책 없는 너 때문에 죽게 생겼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속으로만 삼켰다.


세를 들어 족족 만나는 주인집마다 기가 세고 사람을 힘들게 했다. 지나고 보니까 그 힘들게 한 주인 덕분에 어떻게 해서든지 집을 사려고 했었던 것 같다. 마당 한 곁에 방 같지도 않은 방을 만들어 놓고는 손님이라도 오면 핀잔을 주곤 했다. 신혼이라 둘이만 살 줄 알고 세를 놨는데 웬 손님이 끊이질 않냐고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어떻게 하든 집을, 내 집이 있어야만 했다. 하루하루 콩나물 사고, 두부 사는 것 까지도 계획을 세워 살림을 하고 있는데, 전셋값의 3분의 1이나 되는 총을 샀다고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너무도 허망했다. 이렇게 애써 살 필요도 없는데, 천둥벌거숭이 하고 어떻게 살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력도 없는 사람하고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사냥하는데는 총뿐만이 아니라 사냥개도 필요로했다.



남편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시덥잖게 남 얘기만 떠벌리고 있었다. 아무 반응이 없이 쳐다보니 그제서야 움찔해서는 “그렇게 말 안 하고 있으니 무섭다 야. 기분 풀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당신 허락도 안 받고 총 사서 미안해."

잠깐 쳐다봤더니, 잠시 틈을 비집고들어와서는 “근데 말했어도 못 사게 했을 거잖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몰래 샀단 말이야.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나 알고 하는 얘기냐구. 설마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근데도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며 살고 싶냐고 소리를 질렀다. 자기 마음대로 할 거였으면 결혼은 왜 했는데? 나, 이제 이렇게 사는 거 지긋지긋해. 빨래도 마음대로 못 널게 하고. 만나는 주인마다 하나같이 스쿠루지 영감 같고, 다 심술쟁이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든 전셋집에서 탈출하려던 거였었는데, 당신 때문에 계획이 다 틀어져버렸어. 이 지옥 같은 전세살이를 언제까지 더 해야 하냐고. 당신 때문에 몇 년이나 미뤄진 거를 알기나 아냐고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어릴 때부터 침묵은 벌로나 받았던 것으로 아는 사람이었던 터라 남편은 이 불편한 침묵을 못 견뎌했다. 사실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몰래 총을 사서가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갖고 말을 해야 소용이 없을 거라 그 부분은 마음속에서 내려놓았었다. 다만 엽총 산 것은 일 때문에, 아니면 사냥하면서 꼭 필요하니까 샀다 말을 하고, 내게 미래를, 계획을 보여주길 바랐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것처럼 그날의 비극은 말에 대한 오해서라기 보다 침묵을 이해 하지 못해서 더욱 오래가고 깊어졌다. 몇 날 며칠을 자기만의 침묵에 갇혀 있다 훌훌 털고 일어섰다. 오히려 장시간의 침묵을 견뎌내며 힘을 얻었다.

그날 이후로 나 자신에게 친절하기로, 용기를 주기로 결심을 했다.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에 나오는 것처럼


“넌 좋은 사람이야. 착하고,
심지가 강한 그런 사람.
넌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라며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자기 연민 Self-compassion’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대뇌의 부정적 시스템을 조정하는 매우 중요한 치유법이다. 상상력을 통해 자신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혹평을 퍼붓던 부정적 목소리를 인자하고 따뜻한 포용의 목소리고 바꾸는 과정인 셈이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좌절, 불안, 고통과 직면했을 때 비판 대신 인자한 태도를 취하는 자기 연민의 소통방식을 사용하자 몸과 마음 모두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262쪽



심리학에 문외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일이 생기거나 하면,


진순희! 넌 할 수 있어.
이 상황을 반드시 이겨내고 말 거야.
하늘은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 하잖아. 이겨내야만 해!

이렇게 자기 암시를 해왔다.


그런데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에도 내가 해왔던 것과 똑같은 심리학자 이선 크로스의 연구결과가 나온다.

자신과의 대화에 1인칭 시점을 사용하면 좀 더 감정적이 된 반면, 2인칭의 시점으로 자신의 이름을 넣으면 냉정한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단다. 마음속의 자아와 감정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란다.


지금 현재 힘드신가요? 어려움에 처해 있나요? 자신을 향해 말해보세요.

“OO, 넌 할 수 있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그러면 이 목소리가 당신의 마음을 보듬고 당신에게 힘을 줄 거예요.





제 책이 출간됐어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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