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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11. 2021

저, 회장 됐어요

자리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던가.

『극강의 공부 PT』를 봤다며 중3 학부모의 연이은 전화 상담이 있었다.  

팀이 만들어져야 반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더니 급기야 학원으로 직접 찾아오셨다. 

애석하게 한 명은 시작을 할 수 없으니 대기자 명단에나 올려놓으시라고 했다. 돌아간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왔다. 맘 카페에 상담했던 내용이랑 책의 저자라고 올려놨더니 당신 자녀들도 보내겠다고 쪽지가 오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현재 우리 아이가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학원에서 연락이 와야지만 다닐 수 있으니 직접 문의하라고 전화번호를 남겨놨다고 했다. 본인이 원하는 시간을 알려주면서 가능하면 자기 아이 일정에 맞춰 시간을 짰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전화를 끊고서는 참 세상이 달라지긴 했구나 하면서 내심 기대를 했다. 웬 걸. 기대하곤 다르게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 그 뒤로 다녀간 학부모가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아무 연락이 없었노라고 했더니 어쩌면 좋냐고 애를 태웠다. 2주가 훌쩍 지난 뒤에 다시 전화가 왔기에 중2인 줄 알고 말을 잘못했다. 반이 다 찼다고 잘못 말했더니  학원에서 연락 오기만 기다렸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시간을 반으로 줄여서 혼자라도 시작을 했다.  


   

아이가 첫날 왔는데 완전 청년 같았다. 점잖은 중3 도현이는 듬직한 데다가 반듯하기 까지 했다. 30분쯤 수업을 했을까 아이가 자꾸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왜? 질문이 있는 거야 했더니 내일이 반장 선거인데 연설문 쓰는 것좀 도와줄 수 있냐고 했다. 


“수업해야지” 했더니 못 들었는지 제 동생 것도 봐줄 수 있냐고 재차 물었다. 


“첫날부터 무슨 연설문, 공부해야지” 했더니 바짝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과제를 내주면 자기가 다 할 테니 조금만 봐달라고 했다.      


“3분 스피치지만, 할 게 많아. 원고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스킬도 다 봐줘야 하니, 이번엔 혼자 한 번 해봐.”라고 말했다.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는 

“연설문 제가 집에서 다 해왔거든요. 아이들이 청소하는 거 제일 싫어하니까 청소는 나한테 맡기라는 공약을 할 거예요”한다.    

  

도현아, 네 방 청소는 해?  

   

아니오.     


네 방도 안 치우면서 무슨 교실 청소를 한다고 그래.

실현 가능한 것을 해야지.      


이렇게 면박을 줘도 도현이는 굴하지 않았다. “구석구석 청소하는 걸로 공약을 정했어요” 재차 말을 했다. 담임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아이들이 청소하기 싫어하니 그걸 공약으로 걸면 좋겠다고 했단다.      

듣고 있다가는 

도현아 어떤 반을 이끌어 가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을 듯 해. 그 과정에서 네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설득력 있게 말하면 선거공약으로서는 괜찮지. 그리고 중간중간 질문하는 것처럼 던져놓고 20초 정도 잠깐 멈춰. 그ᄅ면 집중하는 효과도 있어서 반 아이들이 너를 쳐다볼 거야.      


크게 얼개를 알려주고는 2분 이내로 말하게 했다. 3분이라고 해도 1분 30초가 넘어가면 아이들이 집중력이 떨어져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다음은 도현이에게 알려준 양식이다. 


인트로: 간단한 자기소개. 


본문: 공약 1)

      공약 2)

      공약 3)     


끝인사     


전교 회장 선거가 아니고 반의 회장 선거는 요란하게 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의 시선만 끌어도 일단 성공이다.     

반장이 됐다고 도현이가 신이 나서 말을 했다. 같이 회장 선거에 나온 은석이는 정말 내용도 좋고 발표도 잘했어요. 근데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안 된 것 같다고 촌평도 했다. 


마침 다른 학교 2학년 여학생도 있어서 “혜은아 너네는 반장선거 끝났어?” 했더니 아니오 내일까지 지원 가능한 데 아직 두 명밖에 안 했어요 한다. 


“무조건 나가! 학교에서 하는 건 다 참여해야 해. 특목고 가려면 반장 부회장 한 것이 리더십 부분으로 어필할 것이 많지” 했더니 “안 될 걸요” 한다. 


왜?     

"제가 노는 아이로 찍혔거든요."

     

혜은아 그러면 지금이 딱 기회야. 평판을 관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니까 무조건 나간다고 해. 

선생님께 얼른 연락드려.      

그랬더니 혜은이도 속으로는 하고 싶었던지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넣었다.      

배시시 웃으며 “해도 된대요”     


처음부터 두괄식으로 네가 하고 싶은 공약을 먼저 말해.  

그리고 1,2,3 이렇게 세 가지 정도 공약을 써놔. 남아서 원고 쓰고 연습하고 있어. 선생님이 다른 수업 끝나고 잠깐 와서 점검할 게 하고는 연설문을 쓰게 했다.     



도현이에게 알려준 양식대로의 혜은이의 연설문이다.  


안녕하세요 기호 3번 변 혜은입니다. 저는 도라에몽 같은 회장이 되겠습니다. 
도라에몽 주머니에는 뭐가 있나요.
(2초 휴지)네 맞아요. 여러 만능 물건들이 있지요.
 
친구들이 필요할 때마다 다 꺼내 줍니다. 
저도 여러분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날 거예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해드릴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쓰레기 치우기 귀찮으시죠?
제가 회장이 된다면 청결한 우리 반 유지와 여러분의 편함을 위해 청소를 열심히 할 거예요.  
우리 반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운동하고 수다 떨다가 마스크가 홀딱 젖어 끼기 찝찝한 적 있지 않나요? 
그런 불편함을 막기 위해 사물함 뒤쪽에  대량의 마스크를 준비해두겠습니다.
항상 마스크가 필요하시다면 저에게 와서 가져가세요.

도난방지를 위해 제 사물함에 두지만 이 마스크는 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반 모두의 것이기에 마구마구 쓰셔도 됩니다! 
우리가 비록 등교하는 날이 줄었지만 여러분이 학교에 왔을 때 항상 즐겁게 생활하도록 할 거예요.
 편안한 학급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불이 났을 땐 119!
도둑이 들었을 땐 112!
우리 반에 문제가 생겼을 땐, 

기호 3번(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저, 변혜은! 을 불러주세요!      



나중에 혜은이한테 연락이 왔다. 회장 떨어졌다고.

“근데 부회장 됐어요 ㅋㅋ”     


아유, 너무 잘됐네. 부회장이 더 좋아할 게 하나도 없으면서 감투만 쓰는 거라서 너무 좋아.


부회장 하면서 회장이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2학기에 회장 지원하라고 덕담을 했다.     

이미 낮 12시에 소식을 알았는데, 혜은이 어머니께서 5시 넘어서 카톡을 하셨다.     


선생님~ 혜은이 부회장 되었네요^^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잘 된 것 같습니다~~
혜은이는 회장 안되었다고 아쉬워하지만 전 너무 기특했네요.
 망설임 끝에 도전한 거거든요^^
일요일에 학원 안 갔으면 그냥 예전처럼 넘어갔을 텐데...
우리 혜은이 잘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즉에, 12시에 연락을 벌써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다. 

놀기 좋아해서 아이들이 안 뽑아줄지 알았는데, 잘 준비해서 부회장 자리를 거머쥐게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던가.      

혜은이에게는 아마도, 

아주 색다른,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 책이 출간됐어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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